시골로 가서도 잘살 거라는 부모님 말씀이 씨가 됐는지 현재 충남 서산시 인지면 애정길에서 무방부제 안심먹거리 '애정체리농원'을 운영하는 가수 배정희씨를 만났다.
"결혼할 때 처음 우리 시누들이 제 얼굴을 보더니 사치만 아는 한량인 줄 알고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요. 남자가 수레를 끌면 밀어주지도 않을 사람처럼 보였나 보죠. 지금은 반대로 저를 홍길동으로 봐요. 제가 수레를 끌잖아요(웃음)."
그녀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서울과 가까운 서산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워낙 부지런한 성격 탓에 손을 놀릴 수 없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나아가 지금의 체리농원으로 성장시켰다.
지난 10일에 만난 그녀는 장화를 신은 채 팔에는 소쿠리를 걸고 체리 수확에 한창이었다.
- 어린시절부터 '어린농부'였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달라.
"내 고향은 아름다운 남쪽 나라 전남 장흥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대부분 자연과 농사에 관련한 것들이 많다. 평화롭고 조용했던 전경들과 드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로 파란 새싹들이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들, 하긴 지금 생각하니 아름답지 그때야 이런 생각인들 했겠는가.
지독하게 부지런하신 아버지와 언제나 당당하신 어머님 사이에 3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나 시끌벅적한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8남매 중 둘째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상처와 결핍이라는 단어로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사실이다. 큰딸과 큰아들에 대한 편애가 유난스러워 힘든 적도 많았다. 그래도 옛날 분이시니 어쩌겠나.
아무튼, 옛날 한창 바쁜 시기에는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니 시골에서 자식 많으면 큰 복이라고 느낄 그 시기에 우리 부모님은 똘망똘망한 자식들 얼굴만 봐도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농사 채가 많았다. 대부분 일은 작은 집과 묶어서 했는데 우리 집은 제일 먼저 시작했었다. 그리고 작은 집 일을 모두 끝내놓고 다시 제일 늦게 마무리 했다. 당시 나는 주로 남자들이 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낫질도 하고 새끼도 꼬고. 엄마가 시키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부지런하시기도 했지만 손재주도 굉장한 분이셨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풍로를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주문이 밀릴 정도였다. 그 덕에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하지는 않았다. 허드레 작업복을 입은 채 아버지가 일하시면 나는 언제나 배워나가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손길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훗날 내가 마치 농사꾼이 될 것을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57세 이른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하루는 언제나 분주했었다."
- 결혼하고는 서울에서 살다가 서산으로 내려온 이유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내려왔는데 어쩌다 보니 농부가 됐다. 34살에 고향 장흥에서 아이 셋 교육 때문에 서울로 올라갔었다. 그리곤 성장시켜 제 갈 길 제대로 잘 찾아가 생활하고 있다 보니 복잡한 서울이 너무 싫어졌다.
어느날 '이제 복잡한 서울에서 살지 말고 한적한 곳에 살자'고 남편과 얘기하던 찰나에 TV에서 <나는 자연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더라.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고향 장흥으로 내려가기에 너무 멀고, 더구나 애들이 부모 찾아올 때가 힘들 것 같아 인터넷을 뒤져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산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우리 부부가 터 잡고 살기에는 서산이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농사를 지었다. 서산시농업기술센터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고, 무엇보다 체리 작목을 하고 계셨던 서산시귀농귀촌협회 유병일 전 회장님이 곁에 계셔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 말씀하신 것처럼 체리 농장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체리나무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병일 회장님을 만나면서부터다. 기술센터에서 뵀는데 당시 체리 작목을 하신다고 하더라.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체리다. 건강상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진 인기 높은 과일이기도 했고.
그전까지도 다른 작목들은 다양하게 키워봤었다. 그런데 1년 내내 바쁘기만 하고 수익성은 전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체리를 선택하게 됐는데 글쎄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더라. 센터에서 '멘토-멘티'를 선정해 줬고 그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농사법)배울 수 있었다. 배우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아마 모를 거다.
예민한 체리를 키우다 보면 엄마의 심정이 된다. 그러고 보면 자식들이 2남 1녀를 뒀는데 이보다 훨씬 많은 자식이 내 뒤에서 턱 버티고 서 있다고나 할까. 이보다 더 배부른 엄마가 어디 있겠나."
- 현재 해미읍성 상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어떻게 노래를 하게 됐나?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며느리로 들어갔다. 목공소 일을 하는 착한 남편만 믿고 결혼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리는 시아버님이 계셨고 쌀이 떨어져 울고 있는 시어머니를 봤다.
10대 때 남편을 만나서 사랑하다 결혼했지만 어린 새댁이 견뎌내기에는 힘에 버거웠다. 결국, 차도 타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병이 바로 공황장애란 걸 알았다.
'절대 내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책임감이 워낙 강한 성격이라 더 힘들었던 시절, 대식구를 챙겨야 하는 것도 힘에 부쳤지만 전혀 일이라곤 해본 적 없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도 손해도 많이 봤다.
맥 놓고 있는 어느날, 옆집 또래 엄마가 '즐겁게 살아야 한다'며 서울 중랑천 봉사활동 장소로 내 손을 끌고 갔다. 내가 가진 달란트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노래였는데 소위 말하는 재능기부를 그날 하고 돌아왔다.
항상 당당하게 뒷받침해주는 남편 덕분에 노래하면서 내가 처한 것들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그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더구나 그 무렵 가족들도 각자의 길을 찾아가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도 한몫했다.
왜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나.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고. 체리도 빨갛게 익어가고 나도 익어가고. 그러고 보면 체리와 인생은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기술센터에서 멘토-멘티사업을 잘 했다고 인정하여 체리부분 '활성화사업'에 선정됐다.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안다.
사실 그동안에는 여성 체리 농부로는 첫 스타트라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체리로 인해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의 정착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야무진 꿈도 꿔본다. 여성 특유의 세밀함이 체리의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써 온 일지들이 그만큼 나를 성장시켰다.
체리를 키우다 보면 굉장히 어렵다. 어떻게 보면 자식보다 더 많은 손이 간다. 예민한 작물이 바로 체리다. 어차피 선택한 것이었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정성껏 돌볼 생각이다.
앞으로는 친환경 체리 농법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잘 됐으면 좋겠다. 가공 부분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둘 다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방법이 나오리라 본다. 귀농 귀촌하신 분들이 모두 멋지게 정착하여 제2의 삶이 행복으로 물들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