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사교육의 주범 중 하나로 '킬러문항'을 지목하며 수능 출제 시 배제하라고 지시한 그 문제의식은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한 시기와 방식이 부적절했던 까닭에 학교현장은 대혼란을 겪고 있다.
대통령은 문제의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섣불리 변죽만 울릴 경우 큰 파장만 불러올 뿐, 근본적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킬러문항보다 초저출산이 더 큰 문제
사실, 2023년 현재 우리나라는 사교육도 우려할 만한 일이지만 초저출산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인구 대체 요건인 2.1명 미만이면 '저출산 국가', 1.3명 미만이면 '초저출산 국가'로 보는데, 우리나라는 10여 년 전에 이미 초저출산이 시작됐고 반등은커녕 내리막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2020년 OECD 38개국 평균 1.59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2018년 1.0명 미만으로 떨어진 후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그림1 참조). 전문가들은 UN 인구 데이터를 근거로 추산할 때 2080년 한국의 인구가 2021년보다 1600만 명 줄어든 350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대로 가다가는 소수의 젊은 세대가 다수의 노인을 부양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이미 '위험수위'에 이른 것이다.
집값보다 사교육비가 저출산에 2~3배 영향
집값과 사교육비 중 어느 것이 저출산에 더 영향을 미칠까? 지난 15일 대전교육연구소가 대전시의회에서 '사교육비가 저출산에 미치는 영향 분석과 대안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관련기사 :
"주택 가격보다 무려 2~3배, 사교육비가 저출산에 가장 큰 영향" https://omn.kr/24dp1).
이 자리에서 주제발제를 맡은 국토연구원 박진백 박사는 "전년도 사교육비의 합계출산율 기여율이 주택가격의 기여율 8.6~14.0%보다 2~3배 높은 22.5~32.5%로 추정된다"는 2021년 논문을 소개했다. 그는 "첫째 아이 출산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집값 안정이, 둘째 아이 출산율을 높이려면 사교육 억제가 필요하다"고 해결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사교육비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020년에 일시적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뿐, 최근 10년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2022년 사교육비 총액은 무려 26조원에 이르렀고, 사교육 평균 참여율도 78.3%에 달했다(그림2 참조).
특히 우려할 만한 현상은, 저출산이 심화하는데도 사교육비는 외려 늘어나는 악순환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자녀가 1명일 경우, 아이의 '성공'을 위해 가계소득 중 더 많은 부분을 사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경향성이 짙어진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사교육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다.
대만, 일본보다 한국이 더 위험?
박진백 박사의 논문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가 또 있다.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프랑스 국립인구연구소와 함께 2년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자료집에 일본 <사회보장 인구문제 연구소> Fukuda의 '동아시아의 자녀 양육비와 저출산: 한국, 일본, 대만 및 EU 25개국 비교 연구' 논문이 실렸다.
저자는 "학력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에서 자녀 양육비, 특히 높은 교육비는 자녀 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투자할 수 있는 자원량은 자녀 수와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3국과 EU 국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녀 교육비 중 사적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유럽은 국가 부담이, 동아시아 3국은 사적 부담이 많다. 동아시아 3국을 비교했을 때 한국은 자녀 1인당 사적 교육비의 지출 비중이 가장 컸고, 출산율과의 상충관계도 뚜렷했다(대만의 경우 뚜렷한 상충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이나 대만과 비교할 때 자녀 1인당 교육비의 사적 지출이 적은 편이다. 2021년 기준 합계출산율은 한국이 0.81, 대만은 0.98, 일본은 1.3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해법 고민해야
우리나라는 대통령 직속으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설치해 2006년부터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 왔다. 출산/양육수당 도입, 육아휴직 및 다자녀 가구 지원 확대 등 가정의 육아 부담을 더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단순히 출산 및 양육에 필요한 돈을 지원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렸했다. 어렵게 아이를 낳아도 집값과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교육을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과도한 경쟁체제를 완화하지 않고서는 초저출산 심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왼손으로는 킬러문항을 배제해 사교육을 잡겠다면서, 오른손으로는 자사고, 외고 등 특목고를 존치하겠다는 발상으로는 긍정적 변화는커녕 외려 혼란만 키울 뿐이다. 당장 열이 난다고 해열제만 투여해서는 안 되고, 발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결국 해답은 교육체제의 근본적 전환에 있다. 현재의 '사교육 지옥'을 오염된 호수에 비유해 보자. 왜 이렇게 물이 더럽냐며 돌을 던진다고 뭐가 달라지나? 잠시 파장이 일어날 뿐이다. 마을 이장이 앞장서 회의를 열고, 어떻게 하면 썩어들어가는 호숫물을 정화할 수 있는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합계출산율 0.78이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고, 초저출산의 주범이 사교육비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은 킬러문항 배제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저출산 극복 방안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사교육 억제 대책은 교육부에 맡기는 각개전투 방식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여야 협치를 통해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가칭 '초저출산 극복 공론화 500인 회의'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