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동 비좁은 골목길 / 낯선 벽에서 만난 문장 씨앗되고
한 장 사진 조각보처럼 이어 / 살아 있는 이야기로 초대한다
침묵하며 잊혀진 기억 / 쌓인 추억들
회색빛 묵향 퍼지는 보물 3호 / 가족 앨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지
(...)
오늘도 사라져 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생이 꽃이라면 / 지금도 피고 진다
- 화도진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 사진으로 기록하는 아카이빙' 수강생 강주희씨의 시
정말 그랬다. 인천 신포동 비좁은 골목길을 지나 인천관동갤러리로 걸어가면서 나는 이날 개막하는 아주 특별한 사진 전시회 작품을 떠올리며 기대감에 한껏 들떴다.
23일 오전 10시 인천관동갤러리(대표 도다 이쿠코)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진전'이 아니었기에 더욱 값진 전시였다.
인천 중구에 있는 인천광역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관장 강신호, 아래 화도진도서관)에서는 지난 4월 14일부터 '길 위의 인문학' 강좌로 '오래된 미래, 함께 만드는 새로운 과거'라는 주제의 강좌를 실시해왔다. 이 강좌에서는 개인의 역사를 마을과 지역의 역사로 기록하고 수집하는 '내 인생 아카이브' 수업이 진행됐는데 중구에 살고 있는 사진가 류은규씨와 작가 도다 이쿠코씨가 강의를 맡았다.
수강생들은 4월 14일부터 주 1회 모여, 사진 복원과 촬영 및 기억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모두 10회에 걸쳐 익혀왔고 이번 전시는 그들이 갈고 닦은 '수업의 결과'를 전시하는 자리였다.
개막식이 열리기 전에 먼저 도착해 전시된 1, 2층의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사진전에 출품된 작품은 인천 지역에 사는 수강생들이 소장했던 사진이 주종을 이뤘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맥아더 장군상이 있는 자유공원을 뒷배경으로 한 사진이라든지 개항장의 건물 모습, 개발되기 이전 인천의 어느 산동네 골목길 모습 등등이 정겹게 느껴진다.
특이한 건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 대부분이 개인이 간직했던 가족사진이라는 점이다. 가족사진을 공개한다? 개인정보 보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예민한 시각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자신들의 가족사진을 당당하게 사진전에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가 류은규씨의 '개인 사진이 지역의 역사요, 나아가 겨레의 역사'라는 철학을 배경으로 한 강의 힘이 작용한 듯하다. 이 점에 대해 이번 강좌를 주도한 류은규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에 수강생은 15명이었는데 사진전에 참여한 수강생은 9명이었고 1인당 12장 정도의 사진을 출품했습니다. 강의에 앞서 저는 늘 '사진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인간의 기억 작용에서 그림, 글, 사진 이 세 가지는 아주 중요한 도구지요. 사진의 역사는 그림이나 글보다는 훨씬 짧은 140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오늘날 사진이 담고 있는 역사성은 그 어떤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대부분은 자신이 어렸을 적 사진이거나 부모님 모습, 친구들, 자신이 살던 동네 등 평범한 생활사를 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것이 중요한 역사성을 띤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강생들이 출품한 사진들은 하나같이 '생활사'를 대변해주는 사진들이다. 대수롭지 않은 한 장의 사진 같지만 벌써 이들이 간직한 사진 속의 동네 골목은 도시개발이라는 핑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뜻에서 정순호씨의 '화수동 2동 공작창 담길 앞 골목에서 찍은 가족사진'도 의미 깊은 사진이고, 전경숙씨의 '개항장 일대의 옛 건물' 사진들도 역사성이 짙은 사진으로 느껴진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삶과 역사
개막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이번 강좌를 맡아 전시회까지 연결한 사진가 류은규씨는 "기록 사진이라고 하면 흔히 1945년 이전 상황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3대 사진을 찍어두었다면 이 자체로도 훌륭한 기록 사진이 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생활사에 좀 더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강좌를 담당한 화도진도서관 독서문화과 정소영 팀장은 "개인의 기록이 지역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신선하다. 이번에 수강생들의 열의와 호응이 아주 컸다.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해서 강좌를 이어 나갈 예정이고 수강생들이 출품한 사진들도 모두 기록으로 남기겠다"라고 했다.
이어서 수강생 9명이 각각 자신이 꾸민 사진 전시 마당에서 출품한 사진 설명을 했다. 화도진도서관에서는 이들의 사진 설명을 동영상으로 찍었고 전시 기간(7월 9일까지) 내내 전시장 모니터로 방송할 예정이다.
"제가 살던 동네가 고도제한이 풀리면서 모텔촌이 생기고 빌라촌이 급격히 늘어가면서 도시가 기형화되돼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일제가 미곡시장을 장악하려고 1896년 5월 5일 세운 기관, 사진은 1930년대 모습) 등 개항장 주변의 역사성이 있는 건물 위주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특히 송도역 사진은 예전에 찍은 사진과 견주기 위해 이번에 강좌를 들으면서 다시 가서 찍는 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 수강생 전경숙씨
"어렸을 때 사진들을 별 의미 없이 봐왔는데 사진 강좌를 통해 사진의 역사성을 재음미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특히 부모님께서 쏟은 자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사진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는 소중한 강좌였습니다." - 수강생 민정숙씨
"먼저 가신 일본의 친정어머니와 며느리를 딸처럼 대해주시는 한국의 시어머니와 관련된 사진을 출품했습니다. 처음에 반대가 심했지만, 차츰 딸처럼 대해주신 시어머니의 삶의 기록들을 찍어보았습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한일(韓日) 어머니의 삶을 되새겨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수강생 야마다 다까꼬씨
수강생들은 자신이 출품한 사진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주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수강생들이 출품한 사진들의 추억과 기억들이 짠하게 가슴을 적시는 시간이었다. 한 장의 사진을 자신의 사진첩 속에 꼭꼭 숨겨두었을 때는 자신만의 추억이겠지만 이것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공유하는 순간 '아, 맞아, 맞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그것이 우리 동네의 참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야말로 사진이 주는 탁월한 역사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번 사진전을 보면서 각 지역의 이야기를 지역 사람들의 기록 곧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 등으로 남기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런 뜻에서 화도진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 사진으로 기록하는 아카이빙' 강좌는 참신하고 의미 깊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결과물인 이번 전시회 역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전시 안내]
제목: 화도진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강좌 수강생 사진 전시
장소: 인천관동갤러리 인천시 중구 신포로31번길 38 (전화 : 032-766-8660)
전시 일시 : 2023년 6월 23일~ 7월 9일 (금토일 10:00~18:00 개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문화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