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개 호루라기, "문재인은 간첩"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설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열정을 믿는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연에도 발전, 절정, 쇠퇴가 있다. 러시아는 아직 최고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길을 가고 있다."
2016년에 <파이낸셜 타임즈> 워싱턴 지국장을 역임한 찰스 클로버는 독재자 푸틴의 연설에서 '열정(passionarity)'이라는 단어의 등장 여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간파한 바 있다.
클로버에 따르면 열정이라는 단어는 푸틴의 정신적 원천인 러시아의 역사학자 레프 구밀레프가 제시한 '열정적 인간'으로부터 유래됐다. 위대한 정복자와 정치인, 시인, 작가, 음악가, 예술가는 의식적으로 사회의 전통과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기존 질서에 도전한다. 그들이 바로 새로운 지식, 새로운 믿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열정적 인간'이다. 정복자 칭기스칸과 알렉산더 대왕이 바로 그런 인간이다.
푸틴의 연설에서 이 단어는 특정 그룹에게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런 단어를 워싱턴 정가에선 '개 호루라기(dog Whistle)'라고 한다. 푸틴은 연설문에서 그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전쟁과 정복의 욕망을 저항할 수 없는 말로 발표할 때 열정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한다. 이 단어가 사용되면 국가 내의 특정 서클은 푸틴의 인식과 이해를 빠르게 공유하며 결집한다. 푸틴 연설에서 이 단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전쟁과 같은 중대한 국면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유달리 선민의식과 소영웅주의가 강한 윤석열 정권은 권력 내에서 충성 서클의 결집을 도모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문재인은 간첩"이라는 한 문장이다.
이 말이 사용되는 순간 정권 내의 충성 그룹은 열정적으로 결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 정권의 '개 호루라기'다. 물론 이 말은 공적인 자리에서 정부 관료가 사용하지는 않는다. 주로 극우 유튜브나 집회, 토론회 등에서 개인적 의견으로 표현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말을 중심으로 정권의 외곽에서 용병이 조직되고 윤 대통령에 대한 찬양가가 울려 퍼지는 심리적 유격전이 수행된다. 문재인이란 공격 목표가 선명해질 때 투쟁의 에너지는 활성화 된다.
이런 유격 전술을 촉발시키는 당사자는 윤 대통령 본인이다. 올해 3월의 삼일절 경축사와 4월의 미국 의회 연설에선 야당을 지칭해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했고, 6월 자유총연맹 축사에서는 지난 문재인 정부를 지칭해 "반국가세력"이라고 또다시 저격했다. 과거 정부라는 악마와 일전을 불사하는 "자유를 향한 투쟁"이 권력의 본질이자 사명이 된다.
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적 유격전
유격전 신호의 수신자는 정권 내부의 충성 서클 그리고 그와 연계된 외곽조직이다. 사실 정부와 여당보다 정권의 외곽조직이 전투력은 더 강하다. '한국판 바그너 그룹'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정규전이나 국가 공권력보다 용병에 의한 국지전이 부담은 적고 파괴력도 크다. 1940년대에 유대인 상점을 습격한 것은 독일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나치 돌격대였다. 1960년대의 문화혁명에서 부르주아 기득권층을 공격한 주체도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홍위병이라는 민간 돌격대였다. 정작 마오저뚱 본인은 홍위병의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멀리서 지도했을 뿐이다.
정권의 써클에게 자유총연맹이라는 관변단체는 정부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유격전을 선동하기에 적합한 외곽조직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때마침 박인환 경찰제도발전위원장은 국회 토론회에서 "문재인은 간첩"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자신의 유튜브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시위에 "중국 공산당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던 김채환 전 서울 사이버대 교수는 6월 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으로 임명됐다. 이들은 '대한민국 내 북한 간첩 5만 명설, 10만 명설'을 유포하며 시민이 시민을 감시하는 사회, 사상을 검증하고 색출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뭉쳐진 윤 대통령의 심성은 물속 공기 방울처럼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자유총연맹에서 대통령이 말하길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자동 개입하도록 되어 있는 유엔사를 해체하기 위한 종전선언 합창을 했다"며 지난 정부를 한반도 공산화를 획책하는 반국가세력이라고 했다.
듣기에 섬뜩해서 대통령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도 않지만 정권의 외곽 세력을 동원하는 논리가 된다. 종전선언과 유엔사 해체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언제 유엔사가 한반도 전쟁에 자동 개입하도록 규정된 기관인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엉터리지만 말이다.
유엔사? 종전선언? 뭔 뜻인지나 아나?
유엔사령부는 정전협정을 관장하는 일종의 사법기관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정전협정은 깨지는 셈이니 유엔사의 권능은 실효를 상실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유엔사가 필요하다면 전쟁 중에도 언젠가 새로운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대비해 유엔사를 존치하자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자신의 권위에 갇힌 세계에서 사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한다. 윤 대통령이 현 안보 체제가 미국이 한반도에 자동개입하는 것으로 설계돼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큰일이다. 미국은 그 어떤 조약과 협정에서도 한반도 자동개입을 명기한 적이 없다. 단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각자의 국내법 절차에 따라" 개입한다고 한 것이 전부다.
국내법 절차라는 것은 미국의 경우 선전포고권이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에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동개입이니, 인계철선(TRAP WIRE)이니 하는 말들은 이제 군인들조차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을 절대적 권능으로 믿다 보니 이런 착각이 생기는 거다.
게다가 유엔사 해체를 누가 주장했던 적이 있나? 유엔사 강화라는 아이디어는 오히려 진보 정권에서 번성했다. 내 기억으로는 2005년에 당시 바월 벨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장 적극적으로 제기했고, 그 이후 전시작전권 전환 논의가 구체화될 때마다 유엔사 강화 논리는 항상 동반됐다.
문재인 정부 당시에는 미 측이 '유엔사 재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며 16개 회원국과 9개의 전력제공국의 파견 장교를 받겠다고 했다. 종전선언 논의 와중에서도 유엔사는 더 강화되기만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사 해체를 주장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주한미군은 균형자"라며 통일 이후에도 중국의 강압에 대비하는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발언도 했다.
종전선언을 추진하지 않는 것은 윤 대통령의 자유지만, 종전선언이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되는 반국가세력의 책동이라는 진단은 병리적 망상이다. 종전선언은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서 정전협정과 모순되지도 않는다. 이 종전선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젠가 북한이 비핵화를 하고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단계가 오기 전에 상황을 관리하는 일종의 임시적인 규범이다.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유엔사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고 주한미군도 주둔의 명분이 줄어든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전쟁의 위험을 막고 한반도에서 신뢰를 증진하자는 의미의 정치적 선언이 바로 종전선언이다.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종전선언 아이디어는 2006년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의미는 현 적대와 혐오의 분단체제가 가장 이상적이며, 현상 변경은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비핵화와 평화협정으로 가는 문을 여는 종전선언이 불필요하다면 앞으로 북한의 붕괴 또는 북한 체제를 정복함으로써 이뤄지는 무력 통일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한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통일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북한을 점령이나 정복하겠다면 그건 국방부가 할 일이지 통일부 업무와는 무관하다. 이런 극우 인사를 통일부장관으로 내정할 바에야 차라리 통일부를 해체시키는 게 맞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가짜 평화쇼라는 윤 대통령은 오직 "힘에 의한 평화"가 진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통일부를 해체해 절감된 예산을 국방비에 보태는 게 맞다. 그런데도 극우 인사에게 자리를 나눠주면서 정권의 전위부대를 강화하다 보니 그 통일부라는 장관 자리 하나도 필요한 모양이다. 날조된 통일관과 왜곡된 평화관으로 무슨 통일을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종대씨는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