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인재'(人災)였다. 안타깝지만 지난 10년간 도쿄전력의 체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최근 지진으로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의 총책임자였던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는 2021년 3월 KBS와의 인터뷰에서 도쿄전력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도쿄전력을 향한 의혹은 사고 10년이 지난 2021년에도 여전했다. 그해 2월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을 당시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전에 설치된 지진계의 고장을 포함한 피해 상황을 은폐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이처럼 후쿠시마 참사 이후 나오토 전 총리는 탈원전 전도사로서 도쿄전력의 책임론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추진 중인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해 왔다. 방사성 물질의 반감기가 끝나지 않는 시점을 감안해 안전한 처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당시 한일 양국과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도쿄전력과 아베 정권이 "지하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보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최근 <조선일보>가 도쿄전력의 신뢰성을 공개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24일 성호철 도쿄 특파원은 <'후쿠시마 취재'를 거절한 이유>란 칼럼에서 도쿄전력이 해외 언론 15곳에 방류 시설을 공개하며 한겨레와 MBC의 취재 신청을 불허한 데 대해 "그런 취재는 가치가 없다"며 이런 근거를 들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과학에 기반해 투명하게 처리수 정보를 공개하겠다'는 종전 방침과 어긋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정보만 보여주는 행동은 기사다 총리가 말해 온 '정중한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20일 넷플릭스가 공개한 <더 데이스>는 후쿠시마 참사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일본 드라마다. 한국 공개 시점을 두고 논란이 일었던 <더 데이스> 역시 참사 당시 '인재'를 불러온 도쿄전력 수뇌부의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참사 2년 만에 암으로 숨진 요시다 마사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이 남긴 저서 <요시다 조서>와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보고서>, 그리고 한 저널리스트가 관련자 90명을 취재한 <죽음의 문턱을 본 남자> 등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해 당사자들을 포함해 현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더 데이스>는 목숨을 건 현장 인력들의 희생을 강조함과 동시에 극중의 '토오전력'이나 정부 모두 "할 일은 했다"거나 기적적으로 더 큰 피해를 막았다는 자조를 뒤섞는다. 그것이 바로 참사를 대하는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의 정서일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더 데이스>가 간 나오토 전 총리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던 도쿄전력과 오염수 방류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참고 자료라는 점이다.
<더 데이스>가 증언하는 도쿄전력의 신뢰성
"토오전력은 부정확한 정보만 내놓고 있어. 1호기 수소 폭발이 TV로 생중계되는데도 1시간이나 지나 정부에 보고했고. 현장에서 죽을 각오로 임하라고. 나도 그럴 거다. 사장도 임원도 각오하고 임해."
극 중, <더 데이스> 아즈마 신지 총리가 호통을 친다. 우라늄도 아닌 플루토늄 원전인 3호기마저 폭발하며 위기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현장 인력은 물론 정부도 더 한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체르노빌 참사보다 10배에 달하는 피해가 우려된다는 보고까지 나온다. 그런 최악의 위기에서 토오전력 간부들은 토오전력 사장과 부사장 등 간부들은 계획정전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나선다.
"토오전력 말만 믿으라고? 혹시라도 정말 사람이 죽게 되면 토오전력은 살인죄야. 미필적 고의라고. 그런데도 대형 고객이 더 중요해?" (드라마 속 총리 보좌진)
3호기 폭발로 인해 후쿠시마 참사는 국제 원전 참사 중 체르노빌만이 도달했던 위험 수준 레벨7로 격상된다. 드라마 속 총리 보좌진을 분노케한 토오전력은 도쿄까지 정정될 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응급 및 중증 환자들의 생명을 뒤로한 채 대기업 고객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한다.
'원자력촌'이라 불리는 일본 내 원전마피아들이 회사 수뇌부를 장악한 덕택이다. 토오전력의 부사장은 3호기 폭발 직후 보고서를 정직하게 만들어온 직원을 향해 "그래 폭발이지. TV도 안 보나? 3호기 폭발을 그대로 쓰겠다고? 자네 바본가?"라고 질책한다.
사고 진상을 언론에 고스란히 발표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참사를 맞닥뜨린 일본 국민의 눈과 귀라 할 수 있는 언론을 향한 토오전력 간부들의 대응은 고의적 은폐와 늦장 대응, 임기응변식 안일한 대처로 일관됐다. 실시간 정부 브리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다가도 무시무시해지는 상황은 차고 넘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진 직후 일어난 해일로 인한 정전이 원인이 됐다. 이후 토오전력의 대응은 원론뿐인 매뉴얼이 전부였고, 정부 눈치만 보느라 급급했다. 현장 인력의 실수가 원전 폭발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는 원인이 됐다. 물론, 정부 고위 대응팀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도쿄전력은 최근 오염수 방류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더 데이스> 속 후쿠시마 참사의 진상을 확인하는 우리의 입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드라마는 참사 직후부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인력들의 노력을 주요하게 다룬다. 이 장면들이 우리에겐 더한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
당시 도쿄전력은 1호기의 수소폭발을 막고자 벤트(Vent)작업을 시도했다. 벤트는 원전 격납 용기 내 공기를 지상 배기통을 통해 강제로 배출하는 작업이다. <더 데이스>는 정부와 도쿄전력이 목을 맸던 그 벤트가 후쿠시마 참사 이전엔 다른 나라 원전에서 시도된 적 없었다고 말한다. 벤트에 사용된 공기가 유포되면 후쿠시마 주민들 다수가 방사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과 함께.
드라마 속 전문가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 경고한 바 있다. 이 모두 공기 유포만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방사능 오염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상황과 설명이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정화 처리한 원전 냉각수가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 중이다. 이들이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밝힌 냉각수의 양은 올림픽 규격 수영장 500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인 100만 톤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쿠시마 참사의 책임을 물어 일본 검찰이 기소한 도쿄전력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진실은 늘 있어요. 우리에게 보이든 안 보이든, 눈을 가리든 안 가리든. 진실은 우리의 필요나 욕구엔 관심이 없죠. 우리 정부나 이데올로기, 종교에 관해서도 진실은 늘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체르노빌의 선물이죠. 한때 진실의 대가를 두려워했던 곳(소련)에서 이제 난 그저 물어 볼 뿐입니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 체르노빌 원전 참사를 그린 HBO 드라마 <체르노빌> 마지막 대사
"원전 사고 피해 앞에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임을 경고하는 데 월등히 성공한 드라마를 추천하자면 <더 데이스>보단 2019년작인 <체르노빌> 쪽이다. 이 5부작 미국 드라마는 과거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대참사를 원인부터 과정, 결과까지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철저히 분석한다.
물론 <더 데이스> 속 총리가 지속적으로 두려워했던 체르노빌 사고 또한 소련 사회의 폐쇄적인 관료주의가 자처한 인재다. 시스템 부재와 안일한 대처, 원전을 탄생시킨 과학에 대한 부적절한 맹신이 부른 인재라는 원인을 후쿠시마 참사와 공유한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용인하는 중이다. <더 데이스>를 보는 일이 고통스러운 점은 그래서다. 후쿠시마 주민이나 어민들도 반대하는 오염수 방류를 우리가 왜 용인해야 하는가. 우리가 도쿄전력을 신뢰할 이유가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과연 후쿠시마가, 체르노빌이 가리키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일본인들이 만든 드라마가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