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계속되는 와중 맞이한 휴가철,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가장 시원하다는 태백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지대가 높은 태백에서는 2005년 우리나라 최초로 100만 송이 해바라기 축제를 개최했다.
당시엔 땅에는 무조건 작물을 심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해바라기를 심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는 발상이 새로웠었다고 한다. 집에서 틀어둔 EBS방송 중간중간에 이곳 구와우 마을의 해바라기가 소개되었고, 이제 말을 시작한 우리집 어린아이도 "멋지다. 가보자"는 말을 연발했었다.
가족들과 찾은 태백 해바라기 축제장
올해로 19회를 맞는 태백 해바라기 축제장에는 야외조각품들도 설치되어 있어 운치를 더 했다. 이태랑 작가의 핸드마이크 모양의 조형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이 초입에 있었다. 최정우 작가의 '편견 없이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와 '석탄 캐는 사람들', '무경산수', '육면체' 등 야외 조형물이 해바라기 꽃과 어우러져 있었다. 탁트인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매봉산의 풍력발전기는 시원한 느낌을 주었고 맑은 공기에 마음 속까지 편안해졌다.
한여름 폭우와 폭염에도 태백의 기후 덕인지 해바라기는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이곳의 백일홍과 코스모스도 해바라기를 닮아서인지 훤칠해 보였다. 구와우 마을 해바라기 축제장을 천천히 거닐며 풍경을 즐겼다.
활짝 핀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러 오신 분들은 각기 예쁘고 멋진 포즈로 오늘 이 순간을 기념하고 있었다.
"와~ 예뻐, 어쩜 완전 귀여워. 오~ 이 사진 잘 나왔다."
서로를 찍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젊은 아가씨 세 명의 모습이 주변인들의 웃음까지 자아냈다. 그 곳엔 청춘과 우정이 또 다른 해바라기처럼 피어있었다.
해바라기는 두 종류의 꽃이 합쳐진 것으로 노란 꽃잎 부분은 혀꽃이라 하고, 동그란 부분 안에 꽃술처럼 보이는 것은 대롱꽃이라 불린다. 대롱 가운데서 수술이 올라와 노랗게 꽃가루가 생기면 벌이나 다른 곤충들이 와서 수분을 해주고 대롱꽃이 해바라기 씨가 된다고 한다.
고흐와 해바라기, 그 사연
그늘을 찾아서 걷다 보니 해바라기의 뒷모습이 보였다. 초록색 불꽃같은 꽃받침과 커다란 꽃을 받치느라 구부러진 줄기가 목덜미를 연상시켰고 고흐의 해바라기를 생각나게 했다.
처음에는 예쁘고 활짝 핀 해바라기만 보였는데, 어쩐지 점점 올라갈수록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도 보였다. 갈등과 혼돈 속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듯한 해바라기를 보니, 마치 고흐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관련 서적들에 따르면, 1888년 5월 고흐는 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을 소개받았다. 친구인 폴 고갱이 와서 자신과 함께 살기를 바라면서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흐에게는 해바라기는 우정과 희망의 상징이었기에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꾸며 주었다고 한다.
고갱과 고흐는 노란 집에서 63일 동안 함께 작업을 했는데 고갱은 고흐를 조금 무시하고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생 테오가 빚을 갚아 줄 테니 제발 형에게 가달라고 부탁해서 오게 된 아를이었으니, 고갱은 고흐를 보살핌이 필요한 답답한 존재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갱도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만큼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은 너무 지저분했다. 물감 튜브는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땀냄새인지 빨래 썩은 냄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 악조건 속에서도 남쪽으로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비친 <해바라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마치 보랏빛의 눈동자를 가진 것 같은 <해바라기> 작품이 노란 벽에 걸려 있었다."
고흐와 고갱이 사랑한 해바라기는 어찌보면 사람의 얼굴과도 닮아 있다. 태양을 향하며 미소 짓는 모습도, 머리를 흔들며 좌절하고 고뇌하는 모습도 닮아 있는 것 같다.
고뇌에 찬 해바라기, 열정과 순수함으로 파란 하늘을 끌어당기는 해바라기 축제는 오는 15일까지 열린다. 해바라기는 통상 8월 말까지 피어있다고 하니,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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