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은 15세이던 1872년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가 총명한 아들의 출세를 위해 상경시켰을 것이다. 국정이 문란한 시대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배경이 없는 청년들이 그나마 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급제뿐이었다.
한 해를 서울에서 과거공부에 매달리고 이듬 해(고종 10년) 문과에 거뜬히 급제하였다. 김구와 이승만도 과거를 보았다가 낙방했었다. 그는 대단히 두뇌가 우수했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은 그의 신상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어떤 인연이었는지 당대의 세도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만나게 되었다.
김윤식은 정부의 개항정책에 따라 영선사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회담을 갖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역할을 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을 제거하는 방략 등을 제의. 청나라의 개입을 주도했다.
갑신정변 때는 김홍집 등과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 청군의 정변 진압에 기여하고, 이후 병조판서에 이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정책을 주도했다.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 사건으로 5년 6개월 충남 면천으로 유배되고, 해배 되어서 김홍집 내각의 군국기무회의원에 이어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가 아관파천 사건으로 면직, 을미사건과 관련 제주도로 정배되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고 기호학회회장, 흥사단단장, 교육구락부부장, 대동교총회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일이 김윤식을 만나 개화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것은 그의 애국계몽운동 시기였던 것 같다. 『묵암 비망록』이다.
김윤식 스승께서 종신형으로 제주에 유배되었다고 들려왔다. 스승은 자(字)가 순경(洵卿) 호(號)는 운양(雲養)이시며, 대한문학자로서 내가 전에 계동(桂洞) 자택에 나아가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기연(機緣)을 맺어 왔으니 그러므로 나의 개화사상은 전적으로 운양 스승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주석 4)
김윤식은 한때 개화의 역군이었다가 친청파에 이어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부의장이 되고 일제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가 사망하여 사회장이 거론되자 비록 식민지의 상황이지만 그의 생애를 들추어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할만큼 처신이 올곧지 못하였다.
이종일은 젊은 시절 자신이 그의 집을 왕래하며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는 김윤식이 변신을 거듭하며 권세를 좇는 행태를 지켜보면서 그를 추종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는 또한 이도재(李道宰, 1848~1909)로부터 개화사상을 배웠다. 대한제국 때 내무대신·외부대신·학부대신 등을 역임하고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에 반대하고, 고종의 폐위를 압박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끝까지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은 채 1909년 이완용의 모함으로 61세에 사망하였다.
젊은 시절 이종일은 성호 이익의 실학저술과 다산 정약용의 각종 저서를 읽고 실학에 관심을 쏟았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아언각비』, 『흠흠신서』, 『마과회통』, 『맹자요의』, 『아방강역고』 등을 읽었다. 그의 각종 저술에서 널리 학문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다산의 글에서 그의 개혁사상을 터득하고, 조선어 연구의 열정을 배웠다. 뒷날 한글신문을 창간하게 된 배경이다.
이종일이 읽은 많은 실학관계 서적 중 그에게 큰 감화를 주었던 것은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의 저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목민심서』를 읽고 과연 '노저(勞著)'라 평가하며, 정약용의 애국애족 이념과 사상, 선진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사상에 감탄하여 '다산학(茶山學)'을 추존(追尊)하기로 하였고, 더욱 실학사상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특히 『목민심서』에서 수령(守令)의 부정부패상을 규탄하고 조정의 기강을 숙정할 것을 주장한 대목에서 감동을 받고 이것을 오늘에 재현한다면 우리나라도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다산에 감화를 받은 그는 직접 양주에 있는 다산의 집을 방문하여 몇 권의 실학관계 서적을 빌려보는 열성을 보였다. (주석 5)
주석
4>이종일,『묵암 비망록』, 1898년 1월 23일자.
5> 박걸순, 앞의 책,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