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는 후기에 이르러 개신유학에서 발원하는 실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성호 이익의 중농학파→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학파→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학파로 이어졌다. 이같은 실학사상의 도도한 맥락이 수구파의 위정척사세력에 번번히 토멸당하면서 개화ㆍ개벽의 기회를 잃고 나라는 점차 나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이종일은 박은식·정교·이동녕·남궁억·양한묵 등 개혁파 지식인들과 실학을 공부하고 개화사상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동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1864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었다. 이종일이 6세 때의 일이다. 1871년 이필제가 이끄는 동학교도들이 경상도 영해를 습격하고, 1880년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의교본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교조의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위해 삼례집회와 복합상소,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의 발발을 지켜보았다.
일찍부터 실학사상을 배우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와 청년기에 동학의 포교와 교조의 죽임, 교조신원운동과 마침내 봉기한 동학혁명을 보면서 이종일은 동학정신을 조선사회와 개혁의 동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에게 동학정신은 '보국안민'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또한 다산의 이념과 수운의 동학이념을 접맥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실학사상으로부터 그의 개화와 동학사상이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수차 실학의 이용후생 정신을 개화사상의 근거로 할 것을 역설하였다. 즉 실학의 이용후생 정신을 금일에 재현창달한 것이 곧 개화사상이라고 믿었다. (주석 8)
이즈음 그의 동학에 대한 인식이다.
동학사상은 우리나라 민중의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것으로 수운 선생의 이념은 널리 민중을 구하고 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나도 또한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가 이해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주석 9)
이같은 신념을 갖게 된 그에게 관료생활은 버거웠다. 깨어 있는 청년에게 낡은 제도와 고루한 관행은 타매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국내외의 정세는 갈수록 첩첩이고 암울했다. 외세는 조선을 먹잇감으로 여기고 야금야금 몰려오고 민비가 일본 미우라 고로 공사가 주도한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를 계기로 을미의병이 봉기했으며, 굴지의 금광채굴권, 경인철도 부설권 등이 차례로 외국에 넘어갔다. 국난의 초입이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 귀국하여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같은 해 7월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종일은 국난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략을 찾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근대적 신문을 발간하는 데 두었다. 일본 시찰에서도 관심 갖고 탐색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신문발간을 준비하였다.
개화인 유영석이 찾아왔으므로 서재에 맞아들여 신문발행에 대해서 환담했다. 유씨가 말하기를 "신문사업은 구미 각국에서는 벌써부터 크게 유행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한미한 형편이므로 옥파께서 정부에 주장해서 발행허가를 얻으면 어떻겠는가" 내가 대답하기를, "생각해 보면 나라의 개명과 개화에는 신문이 제일이요. 국가의 주인으로는 민중이 제일이니 여기에서 우리들의 사명은 더욱 중차대한 것이다"라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시국에 대해 담론했다.
독립신문은 민중을 선도하는 것이 근본이나 아직도 부녀자층을 개명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의 생각에는 만일에 신문을 발행하게 된다면 반드시 창간부터 부녀자의 계몽지로서 출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석 10)
당시 조선에는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5년 12월 귀국한 서재필이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3년 8개월 동안 국민의 계몽과 자주민권에 크게 기여하다가 수구파에 밀려 서재필의 도미와 함께 폐간되었다.
주석
8> 박걸순, 앞의 책, 16쪽.
9> 『묵암 비망록』, 1898년 1월 16일자.(인용은 박걸순 앞의 책,〈부록2, 묵암 비망록〉인용.(이후『묵암 비망록』은 동일함)
10> 『묵암 비망록』, 1898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