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면서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했다. 나라의 개화를 위해서는 신문발행과 시민조직을 통해 민력(民力)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 별도의 조직을 하게 된 것은 독립협회가 권력에 의해 해체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민력회를 조직한 그는 독립협회의 각종 행사에 회원들과 함께 하였다.
그는 1898년 초부터 민력회의 조직을 구상하였다.
신문발간사업을 의논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유영석·이종문·정교·장효근·염상모·이종면 등 여러 사람이 모였다. 모두 말하기를 "대한제국의 의의에 대해서 토론하는데 과연 우리나라는 장차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들이 힘을 모아 개화운동에 이바지한다면 우리 나라의 개혁은 오래지 않아 달성될 것임은 분명한 일이기는 하나 그 과업은 괴롭고 힘이 드는 까닭에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민중의 계몽을 달성하도록 하면 어떠할까?" 여기에서 내가 말하기를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고 싶다고 했는데 모두 다 찬성한다고 말하여 금주 중으로 조직하기로 협의했다. (주석 33)
그는 조직에 대단한 수완이 있었다. 당시 신문창간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민력회 조직에 나섰다. 보통 사람이면 하나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고 상황이었다. 3월 9일 자신의 집에서 민력회를 조직하였다.
드디어 대한제국민력회를 우리집에서 조직했다. 이종일이 회장이 되고 유영석이 부회장이요 염상모가 주간사가 되고 정교와 이건호와 이종면·이종문이 고문이 되었다. 앞으로 실제 사업을 펼쳐 나가는데 민권을 총합하는 것과 정부의 비정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주로 할 것이다. 회의를 끝내고 한밤중까지 환담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이 종로일대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낼 것과 이권의 양여에 반대한다는 성토을 했으며 우리들 대한제국민력회 회원 30여 명도 또한 이 회에 참가하여 민권을 확보할 것과 국권을 고수할 것을 절규했다. 또 이승만을 총대로 뽑아 외무대신에게 파견하여 항의문 여러 통을 전달했는데 그 중의 한 통은 바로 내가 집필한 것이었다. (주석 34)
민력회 회원은 40여 명이었다. 이종일은 "매주 말 회원들에게 실학과 동학사상을 강론하며 민권운동을 역설하였다. 이는 동학과 실학사상이 민력을 배양,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라 믿었으며, 이로써 국력신장의 근간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석 35)
독립협회와 민력회는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다르지 않았다. 얼마 후 박은식·유근·이건호 등이 입회하면서 세가 강해지고, 두 단체는 수레의 양바퀴처럼 작동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독립협회의 전위 역할도 맡았다.
내가 대한제국민력회원 30여 명을 거느리고 종로에 당도하여 급작스레 단을 설치하고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열변을 토하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탁지부 재정과 군부의 재정을 바르게 집행할 것이며 우리 나라 토지를 외국인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나라 폐하를 충성으로 받들어야 하며 우리 나라의 독립자주권을 지켜야 한다. 민력을 총합하여 부강과 국력의 신장을 꾀하는 것만이 이런 일들을 성숙케 하는 으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36)
독립협회와 민력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었다. 간부들이 구속되고 여러 방향에서 압력이 나타났다. 그럴수록 이종일의 의지는 굳어졌다.
박은식·장지연·유근·정교·이건호 등과 독립협회의 진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비록 정부에서 압력으로 저지하고 있지만 우리들 독립협회 회원과 대한제국민력회 등 수백 명은 탄압에 맞서 씩씩하게 충돌해 가면서 벌떼처럼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민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대한제국민력회를 개회했는데 박은식·유근·이건호 등이 추가로 입회하고 활동방향을 맹세했다. 만일에 독립협회를 해산한다면 우리 대한제국민력회 회원 40여 명이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을 결의했다. (주석 37)
민력회는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회원들은 1914년 5월 보성사 사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여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독립의군부에 전달하였다.
손 의암 혼자서 군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우므로 우리 대한제국민력회원 20여 명과 보성사 사원 30여 명이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수백원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지만 다른 동지들을 돕는데도 상당히 유용한 것이다. 따라서 보성사 사원을 시켜 독립의군부에 백원의 군자금을 전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의암도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보람 있는 일을 묵암이 잘했소이다"라고 나를 응시했다. (주석 38)
주석
33> 『묵암 비망록』, 1898년 3월 5일자.
34> 앞의 책, 동월 9일과 10일자.
35> 박걸순, 앞의 책, 27쪽.
36> 『묵암 비망록』, 1898년 3월 12일자.
37> 앞의 책, 4월 11일자.
38> 앞의 책, 1914년 5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