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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이 <제국신문> 발행, 독립협회 참여, 민력회 조직 등 1886~1898년은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기였다. 40대 초의 혈기 넘치는 시기였다. 그만큼 하는 일도 많았지만 시련도 적지 않았다.

<제국신문>은 발행 부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 광고도 붙지 않았다. 구조적인 한계였다. 신문을 읽을 여성·서민의 독자가 많지 않았고, 상업광고를 의뢰할 기업체도 별로 없었다.

먼저 독립협회의 사정부터 살펴본다.

<제국신문>의 정부 대신들과 탐관오리들에 대한 비판은 관료와 수구세력에게 성가신 존재처럼 인식되고, 독립협회가 유명무실한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없애고 의회를 설립하자는 주장은 고종에게 왕권(황제권)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독립협회는 친로 수구파 정부와 고종이 의회 설립에 완강히 반대하자 친로 수구파 정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의회설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작전을 바꾸어 수구파 정부를 퇴진시키고 관료들 중에서 의회 설립을 지지하는 박정양·민영환 등의 개혁파 정부를 먼저 수립한 후 이 개혁파 정부와 협의하여 상원을 설립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7~9월 간 백성들의 신체와 자유권을 침해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에 협조한 수구파 대신들을 낱낱이 죄상을 조사하여 치열하게 성토 규탄하였다.

또한 독립협회는 1898년 9월 불안을 느낀 황제 고종이 외국인 퇴역 장병들을 고용하여 황실 호위 외인부대를 창설하려고 상해로부터 30여 명의 외국인들을 고용해온 것을 격렬히 규탄하여 외국인들을 돌려 보내었다. (……) 1898년 10월 1일부터 수구파의 일곱 대신 퇴진을 요구하면서 궁궐 앞에서 약 1만여 명의 회원과 시민이 연일 철야 농성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석 39) 

고종은 민의를 수용하는 대신 탄압의 칼을 뽑았다. 독재자나 아둔한 권력자가 늘상 하는 수법이었다.

1898년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 명령이 내렸다. 많은 간부들을 체포하고 각종 서류를 압수했다. 이상재·방한덕·이건호·정교·홍정후·염증모·김구현·남궁억·윤하영·한치유 등 17명이 검거되었다. 이종일과 윤치호는 산속으로 피신하여 검거를 면하였다. "나는 집에 돌아왔는데 체포를 면하여 독립협회의 검거된 회원들에게 미안스러웠다. 그러므로 나는 곧 신문지상에 사과할 것을 발표하기로 했다." (주석 40)
  
 묵암 이종일 선생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이종일은 <제국신문>에 '독립협회 폐쇄는 민의의 말살-국가흥망은 민권유무에 달려 있다'는 사설을 썼다. 사설의 중후반이다.

우리나라가 독립국가임을 온 세계에 선포하기 위해 정부와 서민들이 모두 화합하여 독립문을 짓고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이때 우리는 자주독립국가임을 자랑하고 다시는 무너지지 말자고 맹세한 것이다. 그후 외국에서 토지를 요구하는 일이라든지 무리한 것을 자행하는 일이 발생하면 정부와 독립협회가 적극 방어하여 외국의 방자한 것을 예방한 일이 많다.

이는 아무리 막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남의 나라 권리를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우리 국민의 단합된 결의가 반영된 탓이지 우리 나라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부는 어느 날 밤 갑자기 폐쇄한 데 대하여 많은 의혹을 품게 될 것이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국내사정을 알아차리고 땅과 채광권 등을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해올 가능성이 큰데 이때에 정부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에 대한 식자의 염려가 많다. 그러나 요즈음 학생·시민들은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경무청·고등재판소로 몰려가서 독립협회의 폐쇄를 해제하라고 진정하고 있다. 이처럼 민의가 활발한 것을 본 외국인들은 우리 민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 소문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 민권을 찾으려는 백성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정부가 나라를 보호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권리를 찾지 못하면 6백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모두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주석 41)

주석
39> 신용하, 앞의 책, 79쪽.
40> 『묵암 비망록』, 1898년 11월 10일자.
41> 『제국신문』, 1898년 10월 28일자.

 

#이종일#이종일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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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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