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을 하려면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명말청초 중국의 반주자학의 사상가 이탁오 (李卓吾)는 "벗하지 못하면 스승으로 삼지 말고 스승이 못 되면 벗 삼지 말라"고 하였다.
동학에서 최제우와 최시형, 최시형과 손병희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손병희는 이종일을 무척 아꼈고 신뢰했으며, 이종일은 시종 손병희를 손 성사라 호칭하며 존중하였다.
도타운 두 사람의 인격과 신뢰가 쌓이면서 천도교에서 몇 가지 비밀지하 조직이 구성되고, 뒷날 이를 바탕으로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종일의 『묵암 비망록』을 중심으로 저간의 사정을 추적한다.
1911년 1월 16일
아침에 성사(손병희)를 찾아 뵙고 "갑오동학운동(1894)과 갑진개화 신생활운동(1904)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천도교가 선도가 되어 또 다시 거국거족적인 민족주의 민중시위운동을 일으켜서 일본의 불법적 침략을 타도하고 우리도 당당히 완전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손 성사와는 이미 독립협회에 가담 활동할 때부터 안면이 있어 그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기에 자별한 사이이고 또 비밀 문제도 허심탄회하게 진언할 수 있을만큼 절친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손 성사는 묵묵히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듯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손 의암의 신중론에 애가 탄다.
1월 31일
다시 손 성사를 만나다. 민족을 이끌고 독립시위운동의 선봉에 서줄 것을 권유하면서 왕년의 동학군지휘 열의와 능력을 발휘함이 어떠냐고 전언하였더니 그는
"지금은 사정이 달라 매우 위험하오. 과연 민중이 뒤따라 줄 지가 문제일 것 같으오. 신중히 계획을 세워 봅시다" 하고 역시 신중론을 앞세우며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였다. 나도 속이 타고 안타깝다. 우리는 이대로 일본의 지배 속에서 나라찾기운동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합병 이전에 독립운동하던 인사들이 지하적 양상을 띠고 비상하게 움직인다고 들었다. 지난 초순 안명근 지사의 피체가 독립운동에 마음을 둔 사람들을 주저케 하는 것이 아닐까. 역시 망설임이 있음은 사람의 심정과 판단으로 수긍이 간다.
2월 10일
아직도 경향 각지에서는 의병장들이 구국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그네들도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데 우리라고 못하겠느냐. 내 나이 50을 넘겼으니 오래 살았다. 그러니 한가지 독립운동에 헌신한다면 성취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장효근과 유영석, 이종명 등 대한제국민력회 회원들이 또 다시 모여 대대적인 민중시위운동을 협의하고 나에게 연락해 오기를 "자금 조달에 대해 좋은 결과를 알려 달라"고 한다. 이에 나는 손 성사를 찾아가 대한제국민력회원들의 구국적운동 사실을 고하고 자금지원을 요청하였다. 5백 원에 해당하는 성금을 희사받고 이를 그들에게 주다.
2월 25일
내집 근처까지 일본인 순사가 미행하는 것 같았다. 무슨 '냄새'를 맡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 보성사를 기웃거리는 형사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보성사에 출입하는 동지에게 각별한 단속을 지시했다.
보성사사원들로 비밀조직 결성.
4월 10일
우리의 민족운동은 많은 제약 때문에 겉으로는 비정치성을 띠고 계획을 추진해야만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나는 나의 복안을 대한제국민력회동지와 권동진·오세창 그리고 최린 등에게 은밀히 전갈하여 대체적인 찬성을 얻었다.
5월 12일
손 성사와 점심을 같이 하면서 나의 계획을 진언하였더니 탁견이라고 말하면서 "묵암의 뜻은 이미 제국신문 창간 당시부터 잘 알고 있소. 그 과격성 그리고 용기있는 실천력에는 나도 감동하오. 그러면 민중시위계획도 비정치성을 띠고 먼저 묵암선에서 추진해 보시오. 나는 자금을 지원해 주겠으니."
나로서는 감동적이고 의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10일
지난 달에 신민회 인사들의 검거선풍이 일어 우리들의 '사업'(독립운동임)이 주춤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안악 (안명근사건 - 필자) 인사들의 공판 등으로 인해 심리적 위축을 면키 어렵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비정치성을 표면에 내세우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장효근·김홍규·신영구 등 보성사동지의 권유가 앞으로의 민중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유익한 방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