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작가(1951~)의 <바다에 누워>는, 서울 종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 전시작 중 단박에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바다에 누워>는 작가가 미국 시애틀의 레돈도에서 작업할 때 침대에 누워 몸과 나란히 누운 바다를 보며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수평선 위에 사람의 머리가 떠 있다. 몸체는 없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전시명에 걸맞은 그림이다.
사람의 머리로 보이는 무엇인가가 빨강으로 중앙을 지배하고 그것을 둘러싼 것은 파랑이다. 머리 외에 바다와 하늘, 그 사이의 뭍을 그렸다. 두 개의 파랑 사이에 녹색이 끼어 있다. 모두 수평이다.
상상해보면 유쾌하진 않은 상상
중앙의 두상이 없다고 가정하고 비슷한 그림을 보면 편안한 느낌이 들 법하다. 서용선의 <바다에 누워>는 참수된 듯한 머리가 시선을 아래로 바다를 응시한다. 몸이 없지만, 관람객은 투명으로 주어진 본체를 상상할 수 있다. 몸이 수평선 위로 둥둥 떠 있는 상상이 이 그림에선 유쾌하지 않다. 얼굴 때문이다. 현실에서 몸체에서 잘려 나온 머리는 생명이 없지만, 그림 속의 이 머리는 기괴한 생명력을 보인다. 그림을 90도 돌려서 보면 더 섬뜩하다.
창작의 순간으로 가 보면, 작가가 자신의 머리를 잘라서 저 태평양으로 던져놓고 몸만 남아서 캔버스에 붓칠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림에 햄버거 속 패티처럼 육지가 보이니 아주 멀리 던지지는 않았다. 대양으로 확장된 의식은 엄숙하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성서의 창세기 1장을 떠올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1-10)
인용한 창세기 1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광경이 그림 하나에 들어있다. 수면 위로 운행하는 하나님의 영은 그렇다면 빨강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 그림에서 본원에 맞닿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엄숙하며 두렵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방사한다. 경외와 매혹이 뒤섞인 누미노제(Numinose), 일종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외감 비슷한 느낌이다.
경외와 매혹은 불편함과 연결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태연하게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에 비틀어서 투입하는 데서 생긴다. 핵심은 '시선'이다. 관람객은 시선을 좇아 몸을 띄워야 하고 그러다보면 중력을 거슬러 위태롭게 바다를 보게 된다. 바다에 누워 있지만 그 속으로 빠질 것 같은 불안이 없다. 대신 다른 것을 억지로라도 대면해야 한다. 내내 불편하다.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은 아트선재센터가 마련한 작가 서용선에 관한 연구조사 전시로 2023년 7월 15일부터 10월 22일까지 열린다. 서용선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람-도시-역사'라는 3개 항을 토대로 한국 근대성의 탐구를 시도하며, 이를 '물질-환경(자연)-신화'라는 3개 항으로 확장하고, 세계사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동시대 삶의 조건과 의미를 성찰했다고 김장언 관장은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렬한 색감의 <개사람>은 "작가에게 '개-사람'의 출현은 근대성이 만들어 낸 파국을 냉소하지 않으면서 돌파하기 위한 중요한 실천적 변신이자 가면"이라고 김 관장은 말한다. <바다에 누워>의 3층 구도는 여기에서도 작동한다. 천지인의 발상이 빨강과 파랑의 대조 속에서, 인간이 개와 합체하며 제시된다.
<바다에 누워>가 신화 쪽으로 팔을 뻗었다면 <개사람>은 현실을 천착한다. 기획자의 설명을 준용하면 근대성에 순응하며 혹은 체화하며 망가진 인간의 모습이 중앙에서 위기를 분출한다. '개 같은' 근대성, 혹은 근대성에 조응하느라 개 같아진 인간이라는 뜻일까? 인간사에 억울하게 소환됐을 뿐, 사실 개는 죄가 없다.
빨강과 파랑의 대치 구도는 수승화강(水昇火降: 물은 위로, 불은 아래로)과는 반대이다, 조화롭지 않다. 역전의 열망, 혹은 역전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고통을 형상화한 그림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녹아 있는 회화적 공간
서 작가에게는 역사화가 중요한 장르이지만, 그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 사례는 드물다. <피난민>은 한국전쟁 시기 평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기어오르는 시민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근거로 한 그림이다. 1950년 12월 혹한 속에서 사람들이 생사를 건, 생의 곡예를 맥스 데스포(Max Desfor)가 찍었고 이 사진을 서용선은 회화로 구현했다. 데스포 사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서 작가의 그림은 또 다른 의미로 때로 역사를 뛰어넘어 감성의 충격을 야기한다.
〈'경'자바위〉 또한 역사화에 속하지만 더 옛날로 올라간다. 초록색 숲속에 바위가 있고 붉은색으로 '공경할 경(敬)'자가 쓰인 그림이다. 작가는 '노산군 일지' 전을 준비하며, 경북 영주시의 순흥 지역으로 답사를 떠난 바 있다.
순흥은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금성대군의 역모 및 그와 연관된 순흥 안씨 집성촌의 학살이 자행된 장소이다. 당시 한국 유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서원 옆의 죽계천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10리나 떨어진 마을에서야 멈춰 그 마을에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역사에서 '정축지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경'자 바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유학의 중요한 개념인 '경'자를 새겨 서원의 유생들이 수양을 정진하게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축지변에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원혼이 밤마다 울어, 당시 풍기 군수 주세붕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자를 새기고, 그 위에 붉은색을 칠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설이다.
작가가 이 바위를 찾아 붉은 글자로 '경'을 다시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바위만을 그리지 않고 숲속의 바위를 그린 점을 고민해 보면 좋겠다.
이 전시는 윤리와 정치, 폭력과 파괴, 자유와 해방, 회복과 치유, 삶과 죽음을 중요한 주제로 설정하여 서용선 회화적 공간의 감각적이고 정치적인 세계를 드러낸다.
전시는 3부로 구성된다. '1부: 골드'는 서용선 회화의 중요 공간인 도시를 다룬다. 작가는 1980~90년대에 집중적으로 서울이라는 공간을 그렸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이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의 재건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작가는 이 시기 서울의 변화에 주목했다. 삶과 도시를 표상하는 '1부: 골드'에는 서용선의 대표작인, <숙대 입구 07:00-09:00>(1991), <도시-차 안에서>(1989, 1991), <버스 속 사람들>(1992), <도심>(1997-2000) 등이 있다.
삶과 정치를 다루는 '2부: 블랙'은 서용선 회화의 중요 주제인 역사와 현재를 다룬다. <빨간 눈의 자화상>(2009)으로 시작하는 2부는 자화상이라는 장르를 통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인간을 사회적으로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정치와 역사에 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청령포 1, 2>(2007), <개사람 1>(2008), <'경'자바위>(2014)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서용선의 초기작인 <정치인>(1984)은 1980년대 새로운 군사정부에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새로운 직업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작업이다.
글 안치용(평론가, 크리티크M 발행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