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는 '신(神)'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강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강에 신이 있다면 모든 자연만물에 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대지의 신 가이아'에 비유한 과학자가 있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지구에도 신이 있다. 이 신이 지구를 다스리고 있다'가 아닐까요? 비슷하게도 저는 이번에 강에 살고 있는 신을 보고 왔습니다. 저의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의 오래된 전설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24일부터 2박 3일간 진행된 환경단체 주최의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낙동강네트워크, 대한하천학회, 환경운동연합이 공동주최한 '낙동강 홍수 현황 및 녹조 에어로졸 조사'입니다.
낙동강 하류인 부산에서 시작해 경북 영주댐의 상류에 이르기까지 강의 실태를 훑었습니다. 녹조독소가 물고기, 쌀, 수돗물 같은 음식으로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녹조독소가 에어로졸, 즉 공기로 사람의 폐로 직접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조사 때, 우선 낙동강 인근 지역의 공기를 직접 채집해 분석을 맡겼습니다.
또 하나, 낙동강 인공 보 주변에 특히 심했던 홍수 현황을 확인하는 조사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강의 신(神)이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는 놀라운 광경들을 목격했습니다. 홍수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마을을 덮친 흔적들입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반면 순간 반갑고도 떨리는 광경도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과 두려움이 얽히어 경이롭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장면을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낙동강 지천인 내성천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특히 자연스런 강의 흐름을 상징하는 회룡포가 있죠. 부드럽게 굽이진 물길과 그 물이 실어와 뿌려놓은 금모래는 동화 속 세계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로 시작하는 동요의 고장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내성천의 금모래가 몇 년 전부터 검은 펄로 변해갔습니다. 무수한 잡풀이 강변을 덮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강의 신이 죽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잃어갔습니다. 그 자리를 산과 들의 신이 슬며시 차지하는 것 같았죠. 알고 보니 2016년 완공된 영주댐 때문이었습니다.
내성천 모래는 비에 쓸려내려 가는 만큼 다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내려와야 할 모래가 댐에 가로막혀버린 겁니다. 주로 문명이 만든 썩은 유기물만 쌓였습니다. 자갈이 드러나고 오만 잡풀이 무성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강의 영토에 산과 들의 신을 불러들인 건 사람이라는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랬던 내성천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 신 위력에 눌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역대급 폭우가 있은지 며칠 만에 내성천이 원래 모습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번 홍수가 돌과 펄, 잡풀을 씻어낸 것입니다. 그 자리에 무수한 모래를 실어와 다시 덮어줬습니다. 강의 신이 자기 영토를 회복한 것입니다. 한 번 보세요. 금빛 모래사장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내성천을요.
인체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항상성을 유지합니다. 체온이 오르면 식히고, 추우면 열을 냅니다. 산소가 부족하면 호흡과 맥박수를 올리고 충분하면 떨어뜨립니다. 먹은 음식은 몸이 알아서 소화 흡수하고 에너지로 만듭니다. 내 의지로 애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은 자율신경이라는 무의식적 항상성 유지시스템 때문입니다.
이 항상성이 깨어졌을 때 이를 돌리는 과정이 소위 '병'입니다. 심한 열과 염증과 부종으로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죠. 그 과정을 겪어야 낫습니다. 지구라고 그러지 않을까요?
강의 신이 내성천을 다시 찾은 모습을 보면서 엄청 혼란스러웠습니다. 반가우면서도 무서웠습니다. 강의 신이 자기 영토를 회복한 것은 일시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 신이 만든 거대한 영주댐이 있기 때문이죠. 벌어지고 있는, 사람 신과 지구 신 가이아와의 거대한 영토싸움의 작은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 신은 지구 신 가이아에게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가이아에서 났고, 그 품을 떠나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화 속에는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축적해 놓은 지혜가 있습니다. 실험으로 밝혀진 과학지식은 무한한 우주 신비에 비하면 한 톨 먼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신화 같은 이야기가 우주신비를 직관하게 합니다. 신화는 신과 인간의 희비가 얽힌 갈등 속에서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도 과학의 외피를 두른 신화적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이런 이야기에서 신화적 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이 신화적 진실에 따르면 지구의 신, 가이아는 끝끝내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될 겁니다. 사람 신을 끝내 제거를 해서라도 말이죠. 그래서 회복된 내성천이 반가우면서도 떨렸던 겁니다. 저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9월 부산환경운동연합 웹진에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