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시민운동은 참 대단했다. 91년 5월의 격한 저항
1)을 피크로 '80년대식 운동'이 위기를 맞이했고, 93년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급속한 개혁 드라이브가 추진되었다. 경실련·환경운동연합·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교수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성을 가진 지식인들이 다수 참여해 정부보다 먼저 개혁의 방향을 짚어냈다. 사회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전문가'의 위치에서 방향을 제시했다.
민중이 아닌 시민을, 혁명이 아닌 개혁을,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아닌 정책 제시를 통해 변화를 추구했던 당시 시민운동은 정부의 암묵적 지지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구성된 총선시민연대는 그 절정이었다. 총선시민연대가 부패·반민주·반개혁 정치인으로 지목한 전국 86명의 정치인 중 70%인 59명, 서울에서는 20명 중 19명이 낙선했다. 이 중에는 당대를 호령했던 '3김'
2) 중 하나였던 김종필도 있었다.
시민의 지지도 대단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낙선운동에 대한 지지는 1월 12일 59%, 3월 17일 70%, 그리고 선거일 다음 날이었던 4월 14일에는 78%로 점점 커졌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시민단체는 정부나 국회는 물론 종교계나 언론·군대·기업보다 높은 사회적 신뢰를 받았다.
이처럼 시민운동이 사회적 신뢰를 받고 영향력을 행사한 배경에는 87년의 부분적 민주화 이후 변화된 현실에 맞는 운동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참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시민단체들은 반부패·투명성 확보를 비롯한 정치개혁의 과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양극화 완화, 환경 보존, 사회적 안전 등을 외치면서 과거 권위주의적 개발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배제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향을 뚜렷이 했다.
민중운동·노동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출발한 시민운동이었지만, 1990년대 내내 연대의 끈은 유지되었다. 1996~7년 국회에서 노동법 개악안의 날치기로 노동계가 총파업을 벌이자 종교계 등 다양한 영역과 힘을 합쳐 파업을 엄호했고, IMF 위기로 노동자 서민의 삶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을 때도 노동계와 함께 연대했다. 이처럼 권력에 맞선 사회적 연대가 있었기에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일상화된 위기론 …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같은 시민운동의 힘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
'권력에 대한 날선 감시와 비판'의 자리에는 관성화된 단체 활동이 들어섰다. 풀뿌리에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적 힘을 키우기보다 사무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조직이 관료화되었다. 정치권이나 언론을 바라보다 보니 조직된 힘에 기반한 운동이 되지 못했다. 양당 체제에서 어느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우르르 거버넌스 구조 속으로 달려가 사업을 따오고 다른 쪽이 권력을 잡아 방향이 바뀌면 기존의 지원 혜택을 지키려고 한다.
대규모 시위는 계속 터져 나오지만, 단체의 역할은 갈수록 '정치적 방향 제시'보다 '집회 인프라 제공'으로 제한되는 모양새다.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여전히 언론이 시민단체를 찾지만 이마저도 예전만큼의 영향력은 아니다. 이제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는 기업보다도 낮아졌다. 위기론은 일상화되었고 이에 대한 무력한 대응 또한 일상화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단체 활동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 그 속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힘을 잃어가는 사회운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서 격하고 지속적인 논쟁조차 제대로 벌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라도 진지한 성찰과 토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째, 대중운동을 지향하는가?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시민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회운동을 '또 다른 방식의 정치(politics by another means)'로 이해한다. 정책결정 권한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개혁이나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 정책결정자들을 움직일 만한 사회적 압력을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힘을 키우는 것은 모든 사회운동의 근간이며, 이 사회적 힘은 조직된 대중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운동은 대중과 만나 조직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는다.
그러나 이미 꽉 짜인 관료적 일상 업무를 소화하기에도 벅찬 단체 활동가들이 대중을 조직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어 보인다. 물론 활동가가 꼭 단체 상근자 혹은 반(半)상근자만 의미하는 건 아니기에 자원 활동가가 함께 대중운동을 펼쳐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광고만 낸다고 해서 꾸준히 일할 자원 활동가가 제대로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현장을 뛰면서 사람들을 만나야 가능한 건데, 격무에 시달리는 상근 활동가들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대중이 아니라 자꾸만 언론이나 정치권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단체 활동이 고착된다. 대중적 조직 기반이 없으니 협상력은 떨어지고, 할 수 있는 일에만 치중하게 된다. 작은 변화를 이루면서 효능감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달라지는 느낌이 없다 보니 무력감을 느끼는 활동가는 늘어간다.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둘째, 얼마나 독립적인가?
90년대를 주도한 시민단체들은 '권력에 대한 날선 감시와 비판'을 주된 임무로 삼았고,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유무형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독립적이어야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며 이런 모습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 시절 급격히 늘어난 거버넌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거버넌스는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반영한 측면도 있고, 참여의 통로를 다변화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담론에서 거버넌스를 '수평적인 참여와 협력, 소통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라 치켜세우는 것과는 달리 정책학에서는 거버넌스를 '보다 적은 비용으로 효과적 통제와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파악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거버넌스 역시 개혁 정책이 가로막히고 여론이 악화하며 정치력이 제약된 조건에서 등장했다. 즉, 정부가 시민사회와 파트너십을 제도화해서 정책 성과를 내고자 추진된 것이다. 시민사회는 호응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나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과의 친밀성을 강화했다. 이후 많은 활동가가 정부 혹은 정부와 협치하는 기관에 흡수되었고, 더 많은 활동가가 정부·지자체의 지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거버넌스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평적 관계를 강조해도 거버넌스는 기본적으로 권력의 비대칭성 위에서 이뤄질 뿐이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결사체의 영역'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주요 시민단체들이 특정 정치세력과 촘촘한 사회관계망으로 연결되고 경제적 이해까지 맞물리게 되었다. 자율성과 독립성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정치가 양극화된 현실에서 단체가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외친다 해도 사람들에게는 양당 체제의 어느 한 편과 동일시되고, 자율성과 독립성에 타격을 입어 사회적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를 거부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거버넌스는 운동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체제를 구성하는 정치 세력의 영향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사회적 힘이 필요하다. 그러한 힘은 조직된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다.
셋째, 운동의 연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
역사적으로 한국 시민사회의 힘은 연대로부터 나왔다. 90년대 시민사회가 분화되었는데, 당시 이를 놓고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고 다양한 전선을 만들어서 사회운동의 사회적 힘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분화된 운동 간에 끈끈한 연대가 있으리라는 낙관에서 비롯된 기대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의제와 전선은 늘었지만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몇몇 시민단체가 칸막이 안에 고립되어 각자도생하는 형국이다. 이런 현실은 시민단체 간 혹은 운동 간에서만 관찰되지 않는다. 여러 의제를 다루는 큰 시민단체 역시 개별 의제들은 각각의 조직의 칸막이 안에서 다뤄지고, 단일한 의제를 다루는 소규모 단체라도 그 의제가 다시 세분화되어 칸막이 안에 갇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칸막이를 넘는 연대와 더 큰 운동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사회를 크게 조망하며 운동 과제를 뽑아내는 일은 점점 힘들어져만 간다. 정세분석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고, 단체 활동가들은 눈앞의 과제에 몰두하면서 운동가가 아닌 전문가가 되어간다. 권력자들은 통일된 전략을 가지고 지배체제를 굳히는데, 감시와 비판, 저항과 변화를 외치는 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원심력을 잡아줄 구심력이 없으면 변화를 꿈꾸는 사회운동은 힘을 잃는다. 세상은 지배체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진단 속에 이미 담겨 있다.
1) 1991년 4월 말 명지대생 강경대에 대한 경찰의 쇠파이프 살인 이후 5월 내내 당시 노태우 정부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저항이 이어졌는데, '제2의 6월 항쟁'이라 불리울 정도로 규모가 크고 10명이 넘게 분신을 할 정도로 격했다.
2)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명의 거물 정치인 덧붙이는 글 | 글 김선철 기후정의운동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9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