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9일~31일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카프카스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여행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기자말] |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바쿠를 떠나기 전날 밤 바쿠의 야경을 보기 위해 하이랜드(Highland) 공원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불꽃타워를 지나 순교자 공원묘지에서 버스를 내린다. 이곳은 1990년 아제르바이잔 독립전쟁과 1988~1994년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공원 겸 묘지다.
공원묘지의 끝에는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안에는 영원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기념탑을 지나면 길은 하이랜드 공원으로 이어진다. 공원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불꽃타워와 바쿠 시내 야경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바쿠는 카스피해를 끼고 있어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바쿠 아이(Eye)로 불리는 회전관람차가 해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그 옆에 데니즈(Deniz) 쇼핑몰이 밤에 핀 연꽃처럼 화사한 모습이다.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생각나게 한다.
낮에 보았던 불바르공원이 어둠에 잠겨 있다. 카스피해 왼쪽으로 초승달 모양의 호텔 건물도 눈에 띈다. 그 주변에는 카스피해 여객선과 크루즈가 출발하는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그곳에는 현대적인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들을 통해 바쿠가 카스피해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바쿠를 떠나며 우리는 잠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에 들른다.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3대 대통령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1923~2003)을 기리기 위해 2007년 건축이 시작되어 2012년 5월 완성되었다.
건축은 이라크 출신의 영국인 자하 하디드의 설계로 이루어졌다. 신미래주의(Neo-futurism) 양식이라고 불린다. 그 모습은 우리나라 동대문 DDP를 생각하면 된다. 8층 높이의 건물에 1,000석의 대공연장, 회의실, 전시실, 박물관, 공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는 아제르바이잔과 바쿠의 변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정치와 문화행사들이 여러 번 열렸다. 2012년에는 개관을 축하하는 외국정상들의 모임이 있었다. 2013년에는 모스크바 헬리콘(Helikon) 오페라단의 공연이 있었다.
또 <앤디 워홀의 삶과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렸다.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도 2017년 7월 이곳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였다. 2018년에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가 아제르바이잔 지폐인 200마나트의 도안이 되기도 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정치 인생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이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는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의 3대 대통령을 지냈다. 헤이다르는 푸틴처럼 아제르바이잔 정보국에서 28년(1941~1969) 동안 근무하며 정치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1969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을 이끌었고, 1982년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안드로포프에 의해 소련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1985년 취임 후 개혁과 개방정책을 취하면서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7년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과 교통과 사회간접자본을 담당하는 제1부수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정치에서 물러난 후 1990년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그러나 1990년 1월 소련군이 민주화를 주장하는 바쿠 시민들을 탄압했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 때 바쿠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알리예프는 모스크바를 떠나 고향인 나흐치반(Nakhchivan)으로 귀향한다.
19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아제바이잔 공화국이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나흐치반의 지도자가 되었고, 1992년 11월 아제르바이잔 신당의 지도자가 되어 나흐치반 의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1993년 5월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적인 불안이 시작되고 6월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사태로 시민전쟁이 발발하자 엘치베이(Abulfaz Elchibey) 대통령은 알리예프를 바쿠로 불러들인다.
그는 신속하게 권력을 접수해 의회 의장이 되고, 쿠데타의 주역인 후세이노프(Surat Huseynov)를 내각 수상으로 선출한다. 8월 29일에는 불신임투표를 통해 엘치베이를 실각시키고, 10월 3일 국민투표를 통해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된다. 이때 알리예프를 지지한 사람이 투표자의 98.8%였다.
그는 그동안 아르메니아 측과 협상해 오던 나고르노 카라바흐 문제 해결에 나서 1994년 5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에서 양측의 적대행위가 종식되었고, 아제르바이잔 내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의 자치권이 인정되었다. 1995년 11월에는 헌법을 개정해 삼권분립을 공고히 했다.
1998년 2월에는 사형제를 폐지하며, 이를 범죄자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인권과 시민권 그리고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더 나가 농업과 토지개혁을 통해 국유재산과 집단농장의 해체를 이뤄나갔다.
외교정책에서도 친서방 정책을 취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997년 7월 알리예프 대통령은 러시아를 공식 방문해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했다. 8월에는 미국을 공식 방문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1998년 9월에는 '역사적인 실크로드의 회복'을 위해 조지아 대통령과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또 아제르바이잔 석유의 생산과 개발을 위해 조지아, 튀르키에와 송유관 건설에 합의했다. 그 결과 1999년 4월부터 바쿠-트빌리시-숩사(조지아) 라인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1998년 선거에서 투표자의 77%의 찬성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1999년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겨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전립선과 탈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3년 4월에는 TV연설 도중 쓰러졌다. 그로 인해 그는 8월 미국에서 심혈관과 콩팥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때 아들인 일함(Ilham Aliyev)을 내각 수상에 지명한다. 2003년 10월 그는 대통령 후보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아들 일함을 집권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그의 사후에도 이어지는 우상화와 세습화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일함 알리예프가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영 TV는 투표에서 일함을 지지하도록 하는 방송을 했다. 반대당 후보의 체포, 언론인과 투표종사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이 있었고, 부정선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서방언론은 선거에서 투표자 매수와 협박 등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투표자의 76.84%가 일함 알리예프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2003년 12월 12일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죽었고, 바쿠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인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에 의한 우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소련 시절 이루어졌던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충성 강요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독재주의, 전체주의 정치를 했다고 비판한다.
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것은 전제정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알리예프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스탈린과 베리야의 정치유산을 물려받았다고 공격한다.
지금도 바쿠 시내 곳곳에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공항, 학교, 사원, 공장에도 그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곳곳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2000년부터 매년 바쿠의 헤이다르 알리예프 공원에서 헤이다르 알리예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2003년에는 그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영화가 두 편이나 만들어졌다. 아들인 일함 알리예프도 2009년 대통령의 임기제한을 없애는 헌법개정을 통해 영구집권을 노리고 있다. 유럽의 인권단체들은 이것을 대를 이은 정치 후퇴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