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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민족주의(내셔널리즘)는 정신적 활력소가 되었다. 민족의식이 강렬했던 이종일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실학사상과 동학사상의 바탕에 민족주의의 씨앗을 뿌려 독립사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중국에서는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이루어져 청조가 타도되고 1912년 1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민족주의가 그 이념의 핵심으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이종일은 1912년 측근들에게 경기도 지방의 농어민과 서해안 일대 어민들의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일종의 여론조사이다. 8할 이상의 주민들이 반일감정이 충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백성들은 결코 일제의 강점과 식민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묵암 이종일 선생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12년 봄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의 후원 아래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자신이 조직했던 대한제국민력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범국민신생활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신생활'을 모토로 내세웠지만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였다.

이 운동은 이른바 신생활이라는 비정치 국민집회를 표방하였으나, 실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1912년 7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직접 국민집회의 취지문·건의문·행동강령을 기초하여 김홍규로 하여금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종일은 이 회합이 결코 정치적 모임이 아니고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항변하였으나, 일제는 구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손병희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여 구속자는 한명도 없었으나, 이종일은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하였다. (주석 65)

그는 쉽게 주저 앉는 인물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1912년 8월 25일 순원(孫文)의 주도로 중국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순원은 "공화(共和)를 공고히 함으로써 신해혁명은 전동시대의 어떤 왕조교체보다도 적은 파괴를 수반했으면서도 민족주의와 민권주의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원칙 즉 민생주의를 실현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종일이 꿈꾸어 온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시도하였다. 교주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직의 준비에 나섰다.

중국에서는 정당정치의 효시로서 국민당을 결성했으므로 우리나라에도 정치적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을 의암에게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의암은 침묵만 취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옥파는 종교인으로 정치적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또 다른 방법을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호걸풍모와 지도자상을 지닌 의암은 "옥파의 열렬한 애국심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나의 민족운동 방법은 과거 동학군의 무장행동이 일본에 의해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적인 항쟁이 식민통치 아래서는 오히려 희생을 줄이는 한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오"라고 대답했다.

옥파는 은근히 여론조사를 해서 이미 운동방향을 설정해 놓은 대로 "그렇다면 지식인들을 상대로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전통유지운동을 전개해 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의암은 비로소 좋은 방법이라며 "옥파 동지가 세부 계획을 세워보시오"라고 비로소 허락했다. 옥파는 의암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다음 이 문제를 보성사 동지들과 협의해서 계획을 세웠다. 이 때가 1912년 9월 24일의 일이었다. (주 66)

의암으로부터 내락을 받은 그는 범국민적인 조직을 위해 기독교계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 협의했다. 쉽지 않았다. 일제 무단통치의 독기가 신민회사건으로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을 투옥하고 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를 총독부의 통제 아래 두고 조선민사령, 형사령, 태형령, 감옥령을 공포하여 조선사회를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가던 시점이다.

천도교 단독으로 1912년 10월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 손병희, 회장 이종일, 부회장 김홍규, 제1분과위원장 권동진, 제2분과위원장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 이종훈이다. 본부는 보성사에 두고 회원은 100여 명, 천도교의 비밀지하 독립운동 단체였다.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향후 활동을 위해 모금운동을 비롯 준비에 나섰다. 이종일은 무장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손병희가 과거 동학혁명의 실패를 들어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자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이를 포기하지 않고 은밀히 추진하였다.

이종일은 1914년 동지들에게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제시했다. 1914년이 갑인년 이어서 간지(干支) 상으로 1894년의 갑오동학운동과 1904년의 갑진 신생활운동 (진보회 조직 등 혁신적인 개혁운동), 올해에 이를 계승·재현하는 민중운동을 다시 하자는 것이다.

1894년에 동학도들이 반봉건·반외세 운동의 기치를 들었고, 1904년에 역시 동학도들이 신생활운동의 깃발을 들었듯이, 이제 천도교인들이 선대들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이 담겼다. 3갑운동은 천도교인들의 심성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와 관련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금년은 마침 갑인년(甲寅年)인데 우리의 당초 민중운동을 갑오 동학운동과 갑진 개화신 생활운동의 재현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나는 이해의 민중운동봉기를 '삼갑운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갑오와 갑진의 양차 운동이 경악할 정도로 크게 열기를 뿜었기 때문에 이해 갑인 민중운동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만큼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더욱이 금년에는 세계전쟁이 폭발하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다. (『묵암 비망록』, 1914년 8월 31일자)

주석
65> 박걸순, 앞의 책, 75~76쪽.
66> 김용호, 앞의 책, 53쪽.

 

#이종일#이종일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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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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