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의 여러 가지 민족운동 가운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団)의 조직은 괄목할만한 업적에 속한다. 1914년 8월 천도교의 비밀결사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확대 발전시킨 이 단체는 향후 1919년 3.1혁명으로 이어지는 수맥의 진원지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총재 손병희, 단장 이종일, 총무 장효근, 섭외 신영구, 행동대장 박영신이고, 회원은 50여 명으로 대부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구성원들이었다. 본부는 보성사에 두었다.
그가 이 시기에 무장투쟁을 전제로 하는 천도구국단을 조직한 것은 변화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천도구국단 섭외부의 신영구는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여 손병희에게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보고를 하고, 이에 따라 천도교 지도부는 천도구국단에 물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손병희는 동학혁명과 일본망명, 천도교 창건 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에 민중봉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책임감도 따랐을 터이다.
중국에서는 정당정치의 효시로서 국민당을 결성했으므로 우리 나라에도 정치적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을 의암에게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의암은 침묵만 취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옥파는 종교인으로 정치적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또 다른 방법을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호걸풍모와 지도자상을 지닌 의암은 "옥파의 열렬한 애국심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나의 민족운동 방법은 과거 동학군의 무장행동이 일본에 의해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적인 항쟁이 식민통치 아래서는 오히려 희생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오"라고 대답했다. (주석 67)
이종일은 지행합일의 인물인데다 조직력·집행력을 두루 갖추었다. 손병희의 내락을 받고, 천도교 지도층과는 '삼갑운동'의 역사성을 들어 설득한 것이 수효했다. 마침내 천도교 보성사에 천도구국단이 조직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는 항일비밀결사의 '수괴'는 사형·무기 등 극형이 명시되었다.
천도구국단의 결성 과정을 이종일의 『묵암 비망록』을 통해 살펴본다.
보성사내에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비밀결사로 '천도구국단'을 조직하다. 단장은 나를 뽑아 주었고 부단장에는 김홍규, 총무에는 장효근, 섭외에는 신영구, 행동대장에는 박영신이 각기 선임되었다. 금년은 마침 갑인년인데 우리의 당초 민중운동을 갑오동학운동과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의 재현으로서 목표를 삼았기 때문에 나는 이해의 민중운동봉기를 '3갑운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갑오와 갑진의 양차 운동이 경악할 정도로 크게 열기를 뿜었었기 때문에 이해 갑인민중 운동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만큼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싶은 전망이다. 더욱이 금년에는 세계전쟁이 폭발되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다.(1914년 8월 31일자)
아침 일찍이 상춘원에 체류중인 손 성사를 찾아가서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은 비롯 소규모의 비밀독립운동단체로 그 본부를 보성사 내에 두었으나 우리의 독립을 위한 민중시위운동의 열망은 그 어떤 단체보다도 강하고 의욕적이다." 이라고 상세히 진언하였다. 마침 권동진·오세창도 나와 함께 갔고 장효근은 집근처까지 같이 갔었다.
의암도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천도구국단의 계획이나 인적 구성문제 등을 볼 때는 미약한 듯 하오."
이에 나는 "이 시기에 우리가 과거 두 번의 갑오·갑진 경험(민중운동)을 토대로 하여 민중운동을 일으키면 일본도 상당히 충격을 받고 독립에 대한 보장을 주거나 물러날 가능성도 없지 아니하니 민중봉기를 실현시키기 위해 앞장 서야 합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결국 오늘의 회담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말았으나 실현가능성(독립운동)은 온존해 있는 것이다. (1915년 1월 25일자)
주석
67> 앞의 책,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