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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암 이종일 선생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국제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종전되면서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은 중국에 있어 이권 확대를 노리고 영일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중국 산동성의 독일 이권을 물려받고 남양제도의 위임통치령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비에트정부는 지주의 소유지를 국유화하고 은행·산업의 노동자 관리에 착수했으며 독일과의 단독강화에 의해 평화체제를 갖추었다. 러시아 신정부는 권내의 다민족을 포용한 채로 자결권을 승인하고, 민족자결 원칙을 제시하면서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의회에 「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① 강화조약의 공개와 비밀외교의 폐지 ②공해(公海)의 자유 ③공정한 국제통상의 확립 ④ 군비축소 ⑤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⑥프로이선으로 부터의 철군과 러시아의 정치변화에 대한 불간섭 ⑦벨기에의 주권회복 ⑧알자스 로렌의 프랑스 반환 ⑨이탈리아 국경의 민족문제 자결 ⑩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의 자결 ⑪발칸제국의 민족적 독립보장 ⑫터키제국 지배하의 여러 민족의 자치 ⑬폴란드의 재건 ⑭국제연맹의 창설 등이다.

각 민족은 그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외부로부터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9세기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함께 약소민족의 자주독립사상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제1차대전 결과 독일·터키·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되고, 그 판도에 있었던 종속민족들의 처리문제가 시급한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윌슨의 '14개조 원칙'은 이같은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손병희는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측근들과 상의하였다.

첫째, 무력봉기이다. 한때 천도교 안에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를 했지만, 1894년 동학혁명의 좌절로 보아 실행이 어려웠다.

둘째, 대중시위의 수단이다. 자칫 폭력시위로 전개되면 엄청난 국민의 희생자를 내게 됨으로 배제되었다.

셋째, 외교활동의 전개이다. 국제정세로 보나 헤이그특사 파견의 좌절로 보아 현실성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넷째, 국민대회의 개최이다. 각도 각계의 대표들을 서울에 소집하여 조선독립대회를 개최하고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한다.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실현성이 없고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에서 배제되었다.

다섯째, 독립청원서 제출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일제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살 뿐이오 도리어 탄압만 더 강화될 소지가 있었다.

여섯째, 독립선언문의 발표이다. 개인이나 단체 명의보다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가두와 기관요로에 배포하고, 철시단행, 기도회와 강연회 개최, 일본인 배척, 일화배격의 무언실행 등을 구상하였다. (주석 68)

손병희는 여섯 째 방안을 두고 이종일·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측근들에게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1919년 1월 상순경이다. 이 자리에서 손병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대한다. 우리들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놓쳐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고 "내 이미 정한 바 있으니 여러분은 더욱 분발하여 대사를 그릇됨이 없이하라."고 덧붙였다.

손병희는 거사를 앞두고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교조의 지위를 「유시문(諭示文)」을 통해 대도주 박인호에게 넘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김승학이 해방 후 귀국하여 펴낸 『한국독립사』는 일제의 천도교 탄압 실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왜적은 천도교를 소위 유사종교단체라 하여 종교로 인정치 아니하고 항상 경관을 파견하여 중앙총부와 각지 교구를 감시하였고, 매월 재단상황을 보고케 하는 등 구속과 제압이 날로 심하였으며 사소한 일에도 징역을 가하고 주요 간부의 일거일동을 모조리 정찰하여 교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일상출입에도 속박을 받아 노예와 가축의 대우였다.

교인과 비교인에는 소송이 제기되면 사안의 곡직을 불문하고 교인을 패소케 하였으며 일요일의 집회 강연 등에는 헌병순사를 파견하였고 그 강연 내용이 정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더라도 의례히 가두심문하여 자유를 허치 않았다. 3교주의 수도(受道)기념일인 천일(天日) 지일(地日) 인일(人日)의 기념식에는 특히 경계와 감시를 엄중히 하여 교서출판·월보발행을 정지시키며 강습소를 폐쇄시켰다. (주석 69)

주석
68>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227쪽.
69> 김승학, 『한국독립사』, 133쪽, 통일사, 1965.

#이종일#이종일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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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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