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이 무장 지하단체 천도구국단을 결성하고 있던 무렵 조선사회는 총독부의 폭압 속에서도 간헐적이지만 항일의 불꽃이 나타났다. 1915년 1월 달성군에서 윤상태ㆍ서상일 등이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같은 해 7월 풍기의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연대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 투쟁에 나섰다.
민족종교 대종교를 창도했던 나철이 1916년 9월 구월산에서 일제의 학정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1917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회를 조직·활동했다. 이들 단체의 관계자들은 오래지 않아 모두 검거되었다.
천도구국단은 두 갈래의 목표를 세웠다. 무장봉기와 타종교와 연합하여 대중동원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침이었다.
천도구국단은 무장봉기를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고 이를 구입하려면 군자금이 요구되었다. 일제는 천도교의 자금유입을 막고자 전통적인 성미제도를 봉쇄하는 등 탄압에 광분하였으나 열정적인 동학의 맥락은 끊지 못하였다.
보성사 사원들과 민력회 회원들에 의해 600여 원의 성금이 모아지고 비밀루트를 통해 장총 10여 정과 실탄 200발을 구입하여 보성사 비밀창고에 은닉해 두었다. 평화적 방법이지만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면 사생결단하여 무장항쟁에 나설 것에 대비한 것이다.
이와 관련 이종일의 『묵암 비망록』이다.
영주 대동상점 관련자가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이강래 등 군자금 모집원이 서울에서 체포되어 공포분위기는 여전하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국내의 통치를 더욱 가열화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감시를 피해 그동안 보성사 비밀창고에 일본식 장총 10여 정을 모을 수 있었고 실탄도 2백 발이나 은밀히 쌓아 두었으며 군자금도 6백여 원을 넘고 있다.
이제 10만 원 목표의 군자금과 무기 1백 정을 속히 손에 넣어야 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해야 할 것이다. 손 의암의 주장을 따라야 하니까.
그러나 사세가 불리해질 경우에는 사생결단하고 무장항쟁을 계속하여 갑오동학운동에서의 참패를 설치(雪恥)해야만 먼저 희생된 동덕들에게 면목이 서고 그들을 위로하는 하나의 방도도 될 것이다. 장효근이 와서는 의병의 부활이 없다면 국가는 따라서 망할 것이니 장차 분발하자고 한다. 그의 생각도 나와 비슷한 것 같이 보인다. (1916년 4월 22일자)
장효근이 찾아오다. 그는 나에게 비분강개조로 "반드시 천도교가 결단코 봉기해서 독립만세를 절규해야 하는데 이게 나의 어리석은 생각일까요." 한다.
나의 가슴도 뭉클한다. 나는 손 성사와 의논해서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음을 그에게 말씀 드리겠다고 달래 보내다. 역시 애국심이 강한 동덕임을 알 수가 있다. (9월 16일자)
이종일과 천도구국단 간부들은 기독교계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찾아 범국민연합으로 봉기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시국의 엄중함을 들어 동조하지 않았다. 이종일은 남정철, 이종훈은 이상재, 김홍규는 한규설, 홍명기는 박영효, 신영구는 윤용구, 장효근은 김윤식을 찾아 협의했으나 이상재만이 찬성했을 뿐 모두 거절했다. 이때의 종교계 연대투쟁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얼마 뒤 부분적이지만 기독교계와 불교계가 3.1혁명 대열에 함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