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1918년 9월 6일 천도구국단이 중심이 되어 시민·농어민·상인·노동자들을 모아 서울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원로교섭 지연, 자금부족, 민중동원 미숙 등으로 지연되었다. '무오 독립시위운동'이라 일컬으며 선언문까지 준비했던 이종일은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제사회의 큰 변화의 추이를 주시한 것은 이종일이나 천도교지도부 만이 아니었다.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고, 만주 길림에서는 11월 13일 중광단이 중심이 되어 각계의 대표급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종일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18년 11월 20일자 일기다. "중광단원 39명이 오히려 우리보다 앞에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겠다고 하니 우린 무얼 했느냐, 망설임으로 이같이 낭패지경이 된 것이다."
그가 '낭패지경'되는 일은 또 있었다. 해가 바뀐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우리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2.8독립선언이었다.
일본 동경에서 8일 독립선언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를 속히 손의암에게 보고했더니 그는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월등하구료. 묵암의 오래 전부터의 민중시위운동을 속히 결단하지 못했음이 민망할 뿐이오. 어서 거사 일자를 정합시다. 그동안 사람을 시켜 기독교 측과 불교 측, 유림 측, 학생 측과 연결이 완료되었소."
나는 "2월 28일이 가장 좋은 듯 합니다. 선언문도 육당과 제가 공동으로 완료해두었습니다. 이는 신명을 바쳐 내가 인쇄하겠습니다" 만세운동은 파고다공원에서 다 모여 외치기로 하였다.(<묵암 비망록>, 1919년 2월 10일자)
이종일은 역사적인 독립선언문을 자신이 지었으면 하여 초안을 마련하였다. 40세에 <제국신문>의 사장·주필 등을 역임하여 많은 논설을 썼기에 그의 필력은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손병희가 최남선에게 맡겼다. 최남선은 당대의 문장가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지 않았다. 학자로 남겠다는 이유였다. 일제의 탄압이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 뒤 변절하고 해방 후 반민특위에 연행되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치욕"이라, 스스로 언급할 만큼 치욕의 생을 살았다. 「2.8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이광수도 변절하여 타락한 삶을 보내었다.
가정이지만 그때 최남선이 아닌 이종일의 선언문이 채택되었으면 지금까지도 3.1절 기념식에서 낭독되는, 변절자가 쓴 선언문을 읽고 듣는 아픔이 없었을 것이다. 불교계 대표로 3.1혁명에 참여한 만해 한용운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민족대표로 서명을 거부한 사람의 글을 선언문으로 채택할 수 없다면서 자신이 새로 쓰겠다고 했으나 촉박한 시간 문제 등으로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일본의 쌀 소동 사건이 8월 초순에서 중순경까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고 하니 그 수습을 위해 신경을 그쪽으로 쓰고 있을 때 거사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9월 9일을 거사일로 하고 선언문의 작성을 내게 위임했다. 나는 장문의 초안을 의암에게 보여 여럿이 수정 가필한 다음 인쇄할 준비를 갖추었다. 손의암은 원로와의 교섭을 분담처리하고 육당 최남선으로 하여금 선언문도 짓게 했다. 나의 것은 인쇄 도중에 중지하고 육당 것을 쓰기로 했다.(1918년 9월 2일자)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미년 3.1혁명은 물밑에서 은밀히 추진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했다.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배일의 여론이 비등했다. 비록 망국의 군주이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엄중한 감시 속에 살다 결국 그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점에서 백성들은 분개하였다.
국제정세와 국내의 민심이 비등하고 있었다.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상경하는 시점이었다. 민족대표 서명자가 33인이어서 3월 3일의 장례식날에 거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아무리 폐주이지만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 3월 1일로 앞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