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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떠났다. 체코로. 유난히 가족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걸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 혼자 잠자리에 들 때 가족이 곁에 있는 느낌을 받으라고 파자마와 로브를 만들었다.

항공권을 사면 기본으로 제공되는 35kg의 수하물이 평소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여행을 가도 짐을 많이 채워 가는 편이 아니고 내가 들고 다녀야 하니 10kg를 넘지 않도록 짐을 쌌기 때문이다.

남편의 독립

하지만 여행자가 아니라 거기서 월세방을 얻어 생활을 하려고 하니 허용되는 수하물 무게가 곧 돈이고 살림살이였다. 침대나 책상 같은 큰 짐들은 가서 산다고 해도 여기서 들고 가야 할 것도 많았다. 추가 수하물 50kg를 샀다. 그가 가진 물건들이 무게와 부피라는 잣대로 저울에 올라갔다. 개중에 쓸모가 더 큰 놈만 가방에 담길 수 있었다.

가을부터 입을 수 있는 파자마와 겨울에 입으면 좋을 기모 달린 파자마를 각각 한 벌씩 완성했지만 내가 만든 파자마도 저울 위에 오르는 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 대형 이민 가방에 들어가는 순간 무게와 부피를 차지하게 되는데 파자마는 없어도 살 수 있기 때문에 필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뭘 넣고 빼야할지 고심하는 남편이지만 마누라가 정성껏 만들어 놓은 옷을 가져가지 못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파자마 만들어 둔 건 어디 가지 않으니 안 가져가도 된다고 미리 얘기해줬다.
 
 잠자리에 들 때 외롭지 말라고 만든 파자마 두 벌
잠자리에 들 때 외롭지 말라고 만든 파자마 두 벌 ⓒ 최혜선

아빠와 덩치가 비슷한 아들은 파자마 두 벌이 어부지리로 생기나 싶어 싱글벙글이었다. 파자마도 파자마지만 함께 만든 로브 가운도 무거웠다.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유럽의 집에서 겨울을 나려면 로브 가운이 필요하다고 해서 만들기는 했는데, 무게와 부피를 감당하고 넣어갈 의미가 있으려나. 나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남편은 고민 끝에 에어 매트리스와 이불을 가져가는 대신 내가 만든 파자마 두 벌과 로브 가운을 챙겼다.

남편은 올해 유럽의 대학에 교수로 채용되었다. 서른 살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할 때 결혼했으니 그후 18년 동안 석사, 박사, 강사를 거쳐 드디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실은 올해 가을까지만 해보자고 결정을 해둔 터였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공부라는 밑빠진 독에 가장의 인생을 들이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이미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데에도 다 때가 있는데 이미 사십대 후반으로 접어든 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터널 속을 계속 걸어야 하는 건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가속도를 얹어가며 아래로 추락하는 비행기 같은 우리의 결혼 생활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면 기수를 돌릴 마지노선을 정해야 했다. 올해 가을까지만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미련 없이 대리운전이든 택배든, 일을 하면 돈으로 돌아오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나의 역할은 계속 되겠지만
 
 로브가운
로브가운 ⓒ 최혜선
 
그가 공부를 하는 동안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했던 나는 처음엔 곧 끝날 거라는 낙관으로 버텼다. 박사를 따면 끝날 줄 알았던 고생은 그 후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퇴하신 지도교수님의 자리는 AI와 협업을 할 수 있는 공대 출신으로 채워졌고 강사법이 시행되면서 강사들의 설 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대단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정도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 고생은 안 할텐데' 그를 원망하다가 서른살의 나를 탓했다. 내 팔자는 무슨 팔자인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가 대해 틈틈이 생각하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다 읽은 책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문장을 봤다. 생년월일 8자리 숫자를 더해서 나온 각자의 '소울 넘버'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책에서는 남편과 나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기도 했다.

남편의 소울넘버인 5번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보존해온 비밀스러운 지혜를 세상에 전파하는 대사제 카드에 해당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자 할 때 늘 배움을 선택하는 유형이라고도 했다.

나의 소울 넘버인 8번에 대해서는 '미련맞게 그 짐을 짊어지고 가다보니 본인도 모르게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키우게 되어 경제적으로나 일적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도망가지 못하고 싸우다보니 맷집이 생긴' 사자를 길들이는 소녀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런 잣대로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니 나의 역할은 온달을 장수로 만드는 평강공주인 건가 싶었다. 남편의 역할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와 함께 살면서 그로 인해 힘든 것이 많았지만 그를 선택한 서른 살의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나는 배에 힘 꽉 주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능력치가 증가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이 옷 살 돈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나는 옷을 만들어 입힐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옷 만들기에서 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고, 가족들의 인정을 받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렇게 뭘 모르던 시절의 내 선택에 대해 나를 설득하고 이해하면서 비로소 남편과도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니 담담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내려놓자고도 할 수 있었고. 미련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덤빌 수 있었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남편과 결혼한 덕분에 얻은 능력으로 혼자 외국 생활을 하는 그가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파자마를 만들었다. 만드는 동안 결혼생활의 한 챕터가 닫히고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남편 혼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잘 채워가기를 응원하는 한편, 아빠 것과 같은 파자마를 만들어 달라는 아들을 위해 천을 주문했다. 가족 생활 챕터 1을 남편 파자마 만들기로 끝내고, 2를 아들 파자마와 함께 열어가 보려 한다. 두 번째 장은 뭣도 모르고 시작한 챕터 1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잘 채워가보자고 다짐하면서.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바느질#파자마#기러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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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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