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선지 은퇴해선지 삶에 의미는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렇다고 지난 세월에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10대나 20대 때는 삶이 무얼까 하는 호기심과 신비함 그리고 불투명함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어찌할 바 몰라 했었다. 현실에 찌든 40, 50대 때는 삶이 주는 무의미함과 덧없음에 힘겨웠었다. 경험의 두께에 따라 고민 지점도 달랐던 셈이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냄에 온 힘을 쏟으면서도 인생이 덧없다고 토로한다. 자기가 가진 것이나 해낸 일에 자긍심과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갖가지 고통에 힘들어 하며 무력감을 안고 살아간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고 종착역이 죽음이어서 그런가 싶다가도 여전히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이 채워지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철학자 최성호의 책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필로소픽, 2019)는 이런 모순적인 인간 조건에 관한 탐구 결과다. 책에서는 인간이 처한 모순적 조건을 알베르 카뮈와 토머스 네이글이 주장한 '부조리(absurdity)' 개념에 기대어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삶에는 겉모습(pretense)과 실재(reality)가 있는데, 부조리는 이 둘 사이의 불일치로 생긴다는 것이다. 부조리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카뮈보다는 네이글에 더 의존한다.
네이글은 인간 내면에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일인칭적․주관적․실천가적․행위자적 관점(아래 '일인칭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의 관점 혹은 무관점의 관점이라 명명한 삼인칭적․객관적․이론가적․관찰자적 관점(아래 '영원의 관점')이다.
일인칭적 관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 삶에 깊숙이 몰입하는 관점으로, 우리가 생명, 건강, 직장, 가족 등에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며 일상을 살아가게 한다. 반면 영원의 관점은 삶의 일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세계를 응시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반추할 때가 있는데, 이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관점이다.
결국 인간이란 일인칭적 관점과 영원의 관점이 교차하는 곳(부조리 상황)에 서 있는 존재라고 네이글은 주장한다.
"인간이란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과 영원의 관점의 교차점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을, 그에 대한 답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문하고 또 절망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93쪽)
우리는 일인칭적 관점에서 '평범한 생활인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내면에서는 영원의 관점에 의해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로 삶의 무의미함에 부대끼는 그런 숙명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까? 네이글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하지만 자살은 사고의 혼란에서 오는 환영에 따른 것이어서 방안이 될 수 없다고 네이글은 단언한다. 우울감이나 절망감에 빠진 사람은 허무주의 세계관 때문이라고. 실제 세상에 중요한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이 옳다면 절망할 이유가 없어서다. 더구나 영원의 관점은 끊임없는 회의 내지는 의문을 유발할 뿐이지 목숨을 끊어야 할 만큼 비극적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상적 목적과 태도, 즉 '일인칭적 관점'만으로 사는 것이다. 네이글은 이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자기 의식적, 자기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여서 영원의 관점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기기만 없이 영원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영원의 관점'에만 집중해서 사는 것이다. 즉 불교의 무아 사상을 따르며 사는 방식 – 이를테면, 해탈이 목적인 참선하는 삶 - 이다. 이 방법 역시 하루하루 벌어지는 갖가지 상황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에 더해, 자신의 신념이나 소신을 긍정하는 인간다움을 배제할 수밖에 없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네이글의 세 가지에 더해 저자는 신에 의지하는 선택지 하나를 추가한다.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경우 "신이 인간의 삶에 목적, 이유,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면 그것이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153쪽)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러 논거를 들어 이것 또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 완전성의 표상인 신이 인간을 수단화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한다는 그의 지적에는 공감이 간다.
결국 인간이 부조리 상황을 극복할 근본적인 해법은 없다는 것이 저자와 네이글의 공통된 결론이다. 다만 부조리에 대하여 한탄하거나 절망할 게 아니라 그저 아이러니로 치부하고 빙긋이 미소로 대응하면 된다고 말한다.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해결책인 셈이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태도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아쉽다.
태도가 유일한 해법이라면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영원의 관점이 끊임없이 내 삶은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속삭이지만, 내 삶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부터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태도 말이다. 가령 쓰레기 하나라도 줄여서, 좀 더 고민하여 제대로 투표해서, 글이라도 써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지도록 하는 내 삶의 몸짓들이 '의미'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비록 무의미한 내 삶이 세상에 티끌만 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겠지만 '의미'를 만들겠다는 그 태도와 자긍심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니 부조리가 던져준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고마움으로 다가오고 잘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생긴다.
"인간은 언뜻 초라한 갈대에 불과한 듯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하는 갈대이다. 삶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우주에서 얼마나 왜소한지를 자각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중략)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삶의 드라마는 그 어떤 우주적 장대함과 미스터리보다 더 숭고하고 감동적이다. (중략) 우주의 어느 외진 구석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조차도 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혼신의 노력으로 자기 나름의 삶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부조리의 표본과 같은 인간 말이다." (185쪽)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