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변곡점이 되는 1919년 3월 1일이다.
새벽에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길 두 손 모아 빌었다. 토요일, 날씨도 따뜻하고 청명한 날이다. 우리의 민족자주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온 세상이 도와주는 것 같다.
어제까지의 결의가 오늘의 거사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집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사가 성공되기를 경건하게 기원만 했다.
오전 중 천도교 편집인 이권에게 독립선언서 2백장을 주어 연도에 도열해 있는 군중(국장 참례인 인 듯)에게 배포하고 어제는 한용운으로 하여금 서울의 학생단과 전국 사찰에 골고루 배포하도록 다짐하면서 5천여 장을 주었다. 또 박희도·이갑성으로 하여금 역시 서울의 남녀학생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각기 2천 장씩 준 것 같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 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했다. (『묵암 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1919년 3월 1일 하오 2시,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애국지사 29인이 은밀히 모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김병조는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길선주·유여대·정춘수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간략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불교계 대표로 서명한 한용운이 일어나 독립선언을 알리는 식사(式辭)를 한 다음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낭독하였다.
같은 시각, 종로 파고다공원에는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회집(會集)하여 민족대표들의 참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들은 당초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가 학생·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면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시민·학생들은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팔각정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우렁차게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의 독립만세가 고창되고, 이어서 공원 문으로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부 시위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들은 집주인에게 경찰에 알리도록 하고, 얼마 후 밀어닥친 헌병경찰 80여 명에게 붙잡혀 남산의 외경대 경찰총감부로 압송되었다. 끌려가는 차중에서도 가두시위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던져주는 사람도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파고다공원을 뛰쳐 나와 거리행진에 나서자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석하고자 전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십만 군중으로 불어났다. 시위대 일부는 종로에서 광교→시청앞→남대문을 돌아 의주통으로 꺾이어 프랑스 공사관 쪽으로, 다른 일부는 종로→덕수궁→대한문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사이에 출동한 일제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나 민중들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대열을 정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은 다시 여러 대열로 나뉘어 미국 영사관→창덕궁→일본보병사령부→총독부청사 앞을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었다. 평양·의주·정주·해주·옹진·사리원·황주·서흥·연백·수안·원산·영흥에서 같은 시각에 만세시위가 있었다. 경의선과 경원선 등 철로변에 위치한 도시들이어서 서울과 연락이 용이한 까닭이다.
독립만세 시위는 3월 2일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을 비롯하여 조선8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벌어졌다. 민족대표들은 비폭력·일원화·대중화의 3대원칙을 제시했고, 시위군중은 이에 따랐다. 비폭력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개된 시위 상황을(박은식의 『한국통사』) 보면 다음과 같다.
집회총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 불탄 교회당 47동, 불탄 학교 2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일제는 이보다 훨씬 축소하여 통계를 조작하였다.
3·1독립시위는 국내뿐만 아니었다. 한인이 모여사는 해외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 본토 여러 지역, 러시아 연해주, 미주·하와이, 일본 등지에 살던 교포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와 별도로 제작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행사를 마친 동포들은 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들은 총독부 경찰총감부에 끌려가 혹독한 수사와 고문을 당하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초 일제는 이들을 내란죄로 엮어 중형을 선고하고자 시도하면서 일체의 가족면회를 금지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지방에서 상경한 3명의 지사들도 함께 수감되고, 33인 외에 독립선언서에는 서명하지 않고 '뒷일'을 맡기로 했던 지사들까지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민족지사는 48인이 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만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임규와 안세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각 및 의회에 독립선언서를 제출케 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원조 청원서 등을 영문으로 번역, 전송키 위해 현순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민족대표들이 재판정에서 판검사의 심문에 "독립된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였음을 진술한 것으로 보아, 독립이 되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기로 사전에 뜻을 모았던 것 같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데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