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경에 끌려간 이종일과 민족대표들은 모두 남산 왜성대의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지방에서 뒤늦게 상경한 길선주·유여대·정춘수 세 사람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했다. 구속된 민족대표들에게는 이날 밤부터 개별적으로 혹독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32명 이외에 3·1혁명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관련자들도 속속 구속되어 48명이 주동자로 취조를 받았다. 심한 고문도 가해졌다.
왜성대에서 1차 취조를 받은 민족대표들은 모두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에서 문초·고문·대질 심문의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4월 4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회부되었다. 독립지사들에게 일제는 처음에는 내란죄의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몰아갔다.
우리 대표들을 다루는 것이 점점 포악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말로 올 것이 온게 아닐까. 마음의 결심이 서지 않고는 그들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듣건대 고문이 점차 극심해져서 그 정도가 이를 데 없이 가혹하다. 이 같은 일 때문에 변절자가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만약 고문이 무서워 변절하거나 투항한다면 민족대표자 명단에 끼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대표는 벌벌 떨면서 방성대곡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될 법한 일인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김〇〇 같이 상해로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겠지. 그래서 한용운이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인분세례를 퍼부은 게 아닐까. 통곡하는 자 머리에 인분을 쏟아 부었던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통쾌무비한 일이다.
우리 민족대표가 공포에 떨거나 비열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의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가 그같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목격했다 해도 인분세례를 퍼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는 젊은이다. (『묵암 비망록』, 1919년 3월 5일자)
예심을 맡은 나가지마(永島雄藏) 판사는 4개월이나 재판을 끌었으며 이때 조성된 조서만도 14만여 장에 달했다. 나가지마는 민족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 한국인 변호사 허헌 등이 동분서주하며 변론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일본 검사와 판사는 한통속이 되어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내란죄의 죄목으로 걸었다. "최후의 일인까지라 함은 조선 사람이 폭동을 하든지 전쟁이 나든지 마지막 한 사람까지 궐기하라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민족대표들은 "합방 후에는 조선사람에게서 총기를 모두 빼앗은 까닭에 산에 맹수가 있어 피해가 많아도 이것을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인데, 폭동을 일으킨다 함은 상식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무력이 없는 사람이 무엇으로 싸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스스로 독립의사를 발표하라는 뜻이었다"라고 진술하며 맞섰다.
8월 상순 재판은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무렵 일제의 조선식민지 정책이 다소 바뀌고 있었다.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정책으로 기조가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조선인의 감정을 유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대표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도록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런 여론을 좇아 고등법원은 그동안 적용한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사건이라고 수정하여 이 사건을 다시 경성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듬 해인 1920년 7월 12일 오전 정동 소재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민족대표들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구속된 지 16개월 만에 열린 첫 공판이었다.
법정 주변에는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일제는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물샐틈없는 경비망을 편 것이다. 3·1혁명의 산물로 갓 창간한 한 신문은「조선독립운동의 일대 사극(史劇), 만인이 주목할 제1막이 개(開)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이 공판의 결과는 조선 민중에게 어떤 느낌을 줄 것인가. 공판 당일의 이른 아침 어제 개던 일기는 무엇 때문에 다시 흐리고 가는 비조차 오락가락하는데 지방법원 앞에서 전쟁을 하다시피 하여 간신히 방청권 한 장을 얻어 어떤 사람은 7시경부터 공판정에 들어온다. 순사와 간수의 호위한 중에 방청권의 검사는 서너 번씩 받고 법정 입구에서 엄중한 신체 수사를 당하여 조그만 바늘 끝이라도 쇠붙이만 있으면 모두 다 쪽지를 달아 보관하는 등, 경찰의 경계는 엄중을 지나 우스울 만큼 세밀했다.
붉은 테를 둘씩이나 두른 경부님들의 안경 속으로 노려뜨는 눈동자는 금시에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살기가 등등한 즉… 이에 따라 붉은 테를 하나만 두른 일본인 순사님도 코등어리가 우뚝하여 이리 왔다 저리갔다 하는 양은 참 무서웠다. (주석 71)
주석
71>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