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이란 인간사회의 막장이지만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게, 약한 사람은 허물어지게 만든다. 양심수 즉 독립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종일을 비롯하여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일제의 가혹한 처우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적 신념을 견결히 지켰다.
민족대표에 대한 경성복심원(최종심)은 1919년 9월 20일 개정되어 10월 30일 선고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은 모두 독방에 갇혀 심한 고문과 시멘트 바닥에서 추위, 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식사도 콩과 보리로 뭉친 5등식(五等式) 한 덩어리와 소금 국물이 전부였다.
이와같은 옥고로 양한묵은 구속된 해 여름에 옥사하고, 박준승은 1921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사망하였다.
경성복심원이 내린 민족대표 48인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 손병희·최 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승훈·함태영·한용운, 징역 3년.
△ 최남선·이갑성·김창준·오화영, 징역 2년 6월.
△임예환·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이종훈·홍병기·박준승·권병덕·양천백·이명룡·박희도·최성모·신흥식·이필주·박동완·신석구·유여대· 강기덕·김원벽, 징역 2년
△이경섭·정춘수, 백용성·김홍규, 징역 1년 6월.
△ 박인호·노헌용·송진우·현상윤·정노식·김도태·길선주·임 규·안재환·김지환·김세환, 무죄
일제는 조선민족대표들에게 중죄를 선고할 경우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민심에 휘발유를 끼얹는 겪이라는 내부의 민심동향 분석과, 유화정책으로의 전환으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또한 무죄를 선고받은 송진우·현상윤 등은 논의에 가담했더라도 실제 행동에 가담하지 않은 자를 처벌하는 조항이 당시 보안범이나 출판법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종일은 3년 형이 확정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여러 애국지사들이 병고에 시달렸다. 고문과 부실한 음식, 더위와 추위 때문이다. 특히 손병희의 병환이 심한 편이었다. "성사 손병희의 환후가 매우 위중하다고 해서 천도교인뿐 아니라 모든 인사들이 우려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5월 26일 예심 도중에 양한묵 대표가 사망하여 충격이 컸었다. 그게 고문치사가 아닌가 싶어 울분을 참지 못한 바 있다."(『묵암 비망록』, 1919년 12월 5일자)
옥중에서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들리는 소식 중에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그 가운데 자신이 대표로 있던 인쇄소 보성사의 화재 소실이었다 "애석한 것은 6월 28일 밤 11시 경에 내가 아끼던 보성사가 불타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해서 일본인이 방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보성사에서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천도교의 비밀신문을 찍어냈기 때문에 그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종로경찰서는 보성사의 화재를 실화였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분명 거짓인 것 같다. 절치부심한 일이 아니겠는가?"(1919년 7월 22일자)
보성사 화재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한 태화관도 소실되었다. 일제가 역사적인 두 장소를 '실화'의 구실로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종일의 보성사에 대한 애착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3.1혁명 1주기에 쓴 기록이다.
감옥에서 맞는 만세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감회가 크다. 다행히 장효근이 작년 8월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정성스레 나를 면회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보성사는 우리 민족운동의 온상이니 잘 재건해서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할 것이오. 이곳은 단순한 인쇄소가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처라는 긍지와 사명을 갖게 하시오. 언젠가는 그곳을 중심으로 다시 일을 도모할 것이니… 일찍이 동지들과 천도구국단을 조직, 활동하던 때를 환기시켜 보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회에 젖어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도 완전 독립을 간원한다고 눈으로 말한 뒤 예의 주의를 환기하겠다는 의견을 이심전심으로 서로 알았다.(1920년 3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