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잠시 1919년으로 되돌린다. 이종일은 3월 1일의 거사 이후를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3·1독립선언을 하게되면 일제에 의해 구금되고 어쩌면 살아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독립선언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 중요했다. 당시 국내의 언론매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뿐이었다.
보성사 동지들과 비밀리에 신문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도록, 『조선독립신문』을 발행케 하였다. 이 문제는 손병희가 3.1혁명을 주도하면서 1919년 2월 28일 박인호(朴寅浩)에게 후계자 대도주를 맡겼으므로 그가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신문사장으로 48세의 윤익선(尹益善)을 지명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천도교회월보』 편집인 겸 발행인 이종린이 주도해 만든 지하신문이었다. 독립운동의 소식을 신문으로 만들어 전함으로써 일회성의 독립선언을 보완하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기획되었다. 모든 기사의 원고는 이종린이 썼고, 이종일이 이를 확인했다. 인쇄는 보성사감독 김홍규(44세)가 맡았고, 배포는 보성사 고용인 임준식(22)이 담당했다. (주석 73)
『조선독립신문』은 3월 1일 오후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과 구속된 소식을 보도하여 시중에 배포하였다.
조선민족대표 손병희·김병조씨 외 31인이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하오 2시에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 내에서 발표하였는데 동 대표 제씨는 종로경찰서에 구인되었다더라. (주석 74)
『조선독립신문』 제1호의 머릿기사이다. 내용 중 오류가 있는 것은, 3월 1일 오전에 거사를 예측해서 쓴 기사여서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사장 윤익선의 명의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은 당일 윤익선이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3월 1일 『조선독립신문』이라는 것을 발행한 사실이 있는가?"
"그렇소."
"신문의 원고는 누가 쓴 것인가?"
"내가 썼소."
"신문을 편집한 것도 당신인가?"
"그렇소. 편집도 내가 한 것이오."
"신문은 어디서 얼마나 찍었나?"
"인쇄는 보성사에서 했고, 모두 1만 부를 찍었소."
"신문의 배포는 어떻게 했나?"
"이름을 모르는 조선인 노동자 네 명을 한 사람당 50전씩에 고용하여 경성시내에 배포했소."
윤익선은 원고 집필부터 배포의 책임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는 단지 이름을 빌려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독립신문』의 사장으로 표기되는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이 한 일로 하기로 결심했다. (주석 75)
『조선독립신문』은 윤익선이 구속된 이후에도 발행인의 이름을 바꿔가면서 제27호까지 발행되었다.
3.1혁명 이듬해(1920년)에 미국인들에게 3.1혁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 구미(歐美) 지역 한국위원회 위원인 정한경(鄭翰景)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문으로 쓴『한국의 사정』(The Case Of Korea)에서 『조선독립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3. 4. 5월 동안 일간지로 나왔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는 이 신문은 제작 면에서 퍽 낭만적이고 대담한 면이 있었다. 이 신문은 등사기로 찍어냈는데 제작진은 감시의 눈을 교묘히 피하면서 신문을 계속 찍어내서 그에 얽힌 얘기는 탐정소설이 되고도 남았다.
체포되어 가거나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즉시 그 사람 몫의 일을 했다. 이 신문은 동굴이나 어부의 배 안에서도 찍었으며 심지어 교회에 인조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찍어내기도 했다. 보급망도 아주 잘 정비되었으므로 전국 각처에 뿌려져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과 일본인들도 받아볼 수 있었다.
총독은 매일 아침 자기 책상 위에서 이 신문 2장씩을 발견했다. 일본인들은 완전히 당황했다. 외딴 초소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초소의 의자에서 이 신문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간수들은 각 감방에 이 신문이 배포되었음을 뒤늦게 알곤 했다.
신문을 배부하다가 수백 명이 체포되고 발행문에와 관련된 혐의로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엔 편집자들도 많았지만 그 신문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발행되었다. 이 신문 발행을 주관한 일단의 사람들을 완전히 체포했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들을 담당한 검사의 책상 위에 그 신문이 또다시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주석 76)
주석
73> 조한성, 『만세열전』, 178쪽, 생각정원, 2019.
74> 『조선독립신문』, 제1호.
75> 조한성, 앞의 책, 180~181쪽.
76> 「한국의 사정」,『3.1운동』, 42쪽, 국가보훈처,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