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
('
18, 200, 163... 이 숫자가 밝혀낸 핏빛 잔혹사'
https://omn.kr/25phe에서 이어집니다.)
전국 유해발굴지에서 버클은 빠지지 않고 출토되고 있다. 모양은 구멍에 꽂는 버클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여양리에서 나온 버클에는 다양한 문양과 의미가 담겨있다. 요즘 시대에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무늬를 지니고 있다.
독립(KOREA), 여자하키선수, W, 부엉이 그림, 새 그림, 자유(LIBERTY) 등이 새겨진 버클을 통해 유해의 당시 신분과 경제적 여건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발굴단장의 말에 따르면 버클은 수입품으로, 외국에서 유학 시절 구매했거나 유학을 다녀왔던 사람에게 선물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진주형무소는 재소자들을 학살지로 보내기 전 A, B, C 등으로 구분하였다. 사상범 중 요주의 인물이 A로 분류됐으며 가장 먼저 사살당했다. 여양리로 끌려가 학살된 자들이 A 분류 인물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해본다. 이유인즉 여양리 발굴장에서 노출된 유품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폐광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 중 완벽한 모습
페광 안 물 속에서 발굴된 유해 한 구는 머리카락부터 두개골, 어깨뼈, 갈비뼈, 팔, 다리, 등 인체 형태가 개체수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였다. 그 유해가 입고 있었던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는 태인(泰仁)이라고 적힌 도장과 젓가락, 구두칼이 나왔다.
'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피학살자는 엎드린 모습으로 물속에 있었기에 부패가 덜 되었다. 키는 165cm 정도로, 하의는 부패돼 없어지고 상의 양복만 남아 있었는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학살당한 날짜가 1950년 7월 21일부터 26일임을 감안하면, 무더운 여름 날씨에 긴 팔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멋쟁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복 안 쪽에는 '대송(大松)'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대송은 진주 중앙시장 근처에 있었던 양복점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여양리에서 학살된 자들이 진주지역 보도연맹원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유해 발굴 현장에서 도장이 나온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도 유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기에 어느 유품보다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진주지역 10차 발굴 중 도장 2개가 노출돼 유족을 찾은 바 있다. 유족 중 한 분은 모 고등학교 교사의 아버지로 확인됐다. 유족회장이 몇 차례 연락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찾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면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극구 거절했다. 연좌제로 인한 피해의식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발굴을 진행한 이상길 교수는 "태인(泰仁)'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피해자들이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끌려왔다'는 증언을 토대로 진주와 하동 등지에 전단 1만여 장을 뿌렸다.
이윽고 '피해자가 자신의 외삼촌인 것 같다'며 여수에 사는 송아무개(66)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태인의 누나인 송씨의 어머니가 생존하고 있는 사실도 알아냈다.
인골 전문 고고학과 교수에게 '태인'의 얼굴 복원 작업을 시도하는 한편 송씨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입수해 두개골 등을 대조했다. 그 결과 남매가 분명하다는 의견을 들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진행된 DNA 분석 결과는 불일치였다.
이 교수는 DNA 검사 결과를 가지고 태인 선생의 유족을 찾는 데 동분서주하였다. 수소문 끝에 태인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세 명 나왔는데, 두 명은 DNA 확인 결과 불일치했다.
나머지 한 명인 태인 선생의 여동생과 통화를 하고 당시 조현기 진주유족회 대책 위원장, 민간인 학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구자환 감독과 함께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전에 이 교수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이후 유족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드디어 찾다
필자는 논문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의 실상과 성격'을 읽게 되면서 태인 선생의 유족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여양리 발굴에 관련된 분들의 근무지를 찾아 고성, 함안 등을 다녔다.
당시 진주유족회장, 진주유족 대책위원장, 박물관 연구원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기억이 안 난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참으로 암담했다. 마지막으로 구자환 감독께 연락하니 이 교수가 태인 선생 누나와 만날 약속을 해놓고 안타깝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태인 선생의 5촌 동생 연락처가 있다"며 잠시만을 외친다. 그 짧은 순간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찾았어요!"
"감독님 진짜 고맙습니다!"
전화 끊고 바로 태인 선생의 5촌 동생께 전화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린다. 필자를 소개한 후 태인 선생에 대해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저는 잘 모르고 태인 형 막냇동생이 서울에 살고 있으니 동생한테 연락을 해보세요"라고 한다. 연락처를 받고 너무나 기뻐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필자는 한숨을 돌리고 이 교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싶고 했던 태인 선생 유족과 연결이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동생에게는 70여 년 전 응고의 세월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필자를 소개한 후 '이상길 교수가 대학 은사입니다' 하니 "그 교수님, 잘 알지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 하신다.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통화한 결과, 태인 선생의 유족이 확인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 2021년 9월 어느 날, 정태인씨의 동생 정상중씨와 진화위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태인 선생의 진실규명 신청도 할 겸 정상중 어르신을 충무로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얼굴을 모르니 사진을 찍어서 옷차림을 알려주신다. 출구로 나오니 키가 크고 건장한 어르신이 서 계셨다. 느낌이 온 건지 우리는 눈빛만 보고도 서로를 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벗처럼 반갑고 또 반가웠다.
어르신과 함께 진화위 사무실로 향했다. 조사관을 만나 접수처에서 준비한 '호적초본'을 확인했다. '정태인' 이름 세 글자가 장남으로 기재되어있는 걸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정상중 어르신은 정태인 선생의 막냇동생이었다. 접수를 마친 후 우리는 휴게실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형의 유해를 보고 싶지 않아 한 이유
정상중 어르신에게 형에 대해 물었다.
"형은(당시 25세)은 아주 미남이었어요. 3남 2녀 중 장남으로 당시 미혼이었어요. 부모님이 진주 나동(내동)에서 양조장을 운영해 상당히 부유하게 살았어요.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습득할 정도로 형은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렸어요.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외삼촌 두 분은 일본 유학에 다녀올 정도로 똑똑하고 지식인이었어요. 두 분의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대여섯 살 때, 형이 진주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한복을 멋지게 입고 관중 앞에서 연설을 했어요. 박수 받는 모습을 보며 제가 엄마에게 '형이 너무 멋있어 보여' 라고 한 기억이 있어요.
'형이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인민군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우리 누나들도 좌익활동을 많이 했어요. 경찰이 형을 잡아 가려고 우리 집 근처에서 매일 잠복해 있었어요. 이 때문에 하루도 편히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옆집이나 친구 집에서 자는 일이 태반이었고, 가족들이 고통과 수모도 많이 당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그동안 했던 좌익활동을 면제해 준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지서로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돼 형무소 감옥에서 며칠간 구금되었다가 학살당했어요. 형이 학살된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어요. 양조장과 전답을 처분하고 부산으로 이사했어요. 지금은 누나 둘과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형의 유해를 보고 유품을 찾아갈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유해와 유품을 보면 그 당시 엮어진 형제의 영혼이 생각날까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 그가 필자에게 '형의 사진을 보고 싶다'고 청했다.
"지금 형 사진 가지고 오셨어요?"
"물론이지요."
"어디 한번 봐요."
필자는 얼른 사진을 보여드렸다. 상의 옷과 구두칼, 젓가락, 도장 등이 담긴 유품 사진을 보자 그가 "형이 그때 이런 옷을 입고 갔네요"라며 착찹한 심정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형을 마음 속에라도 품고 싶은 듯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형의 유해를 어디에 안치하고 싶습니까?"
"국가에서 운영하는 추모시설에 모시고 싶어요."
"만약에 유해를 보존 처리하여 교육 현장에 전시용으로 활용할 기회가 된다면 활용해도 될까요?"
"교육자료로 활용한다면 유해와 유품을 위임하겠습니다."
현재 정태인 선생의 유해는 명석골 컨테이너에 보관되어 있다. 유품은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유족을 찾은 유일한 분인데도, 유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이 사실을 이 교수가 알면 크게 기뻐할 거라고 생각에 잠겨본다.
5회 여양리 편이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