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고 다루어 온 방식을 생각하면 기후 위기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기후위기는 성장을 압박하는 구조적 요인이 내재한 자본주의 체제와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물질주의적 성장이 근원인 기후 문제는 기존의 성장 패턴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성장 신화가 공고해졌고 성장의 대안을 생각할 상상력은 고갈됐다.
오늘날 다수인 성장 신화의 추종자는 성장을 벗어나자는 접근 방식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하지만 기후위기의 실상을 외면하는 성장 신화야말로 비현실적이다. 기후 문제는 이제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강하게 경고한다. 더구나 '이스털린의 역설'이 보여주듯 일정 수준을 지나면 성장은 삶의 질 향상과 무관해진다. 성장할수록 행복도나 만족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신체의 열량 섭취에 빗대자면, 한 개인의 건강 유지 비결은 과소도 과잉도 아닌 균형 섭취에 있다. 섭취하는 열량이 부족하면 몸이 허약해지지만, 계속해서 많이 섭취하면 비만이 된다. 한창 성장할 때가 지나면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균형 있게 먹느냐가 건강의 관건이다. (*팀 잭슨, <포스트 성장 시대는 이렇게 온다> 128-130) 세계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나라가 성장할 때는 벌써 지났다.
기후 문제는 보이지 않는 쓰레기(waste)인 온실가스의 과다 배출, 곧 낭비(waste)의 문제다. 쓰레기 과다 배출과 낭비는 생산과 소비 양식, 곧 소비주의 생활양식의 문제다. 소비주의는 '저기'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안팎에 있고, 상대할 대상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다. 성장의 대안을 찾기 어려운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성장의 대안을 찾고 실천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변화, 생태적 회심이 필요하다.
어원상 회심(μετάνοια)은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변화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사고방식이 우리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태적 회심은 기존의 인간관계를 넘어 "생명,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여 세상의 근본적 변화를 이끄는 내적 변화다(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215항). 기후 문제의 맥락에서 말하면, 생태적 회심은 생산과 소비 양식에서 비롯하는 사회·생태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겠다는 결단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연과학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전혀 다른 세계상을 제시했다.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Big Bang)'이라 부르는 대폭발로 시작했으며 우주 만물은 빅뱅 이후의 수많은 생성과 변화의 과정으로 생겨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구 또한 이 과정에서 약 40억 년 전에 생겨났다.
빅뱅은 만물의 공동 기원이며 모든 것은 서로 존재와 생명 차원의 근원적 유대로 연결된다. 현대 과학의 세계상은 기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 곧 '집'에 가깝다.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οἶκος)'에서 파생한 '에콜로지(ecology)'를 '생태(학)'로 옮기므로 세계를 집으로 보는 관점은 생태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생태적 회심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생태론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일이다. 생태적 회심으로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동의 집'이 된다. 집 안의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존하는 집에서 모든 것은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있다. 어떤 것이든 인간을 위한 유용성보다 존재 그 자체가 먼저다. 생태적 회심으로 우리는 네가 안녕하지 않으면 나도 안녕할 수 없고, 개인의 안녕은 세상의 안녕 없이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도 같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세계를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연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빼내라고 부추긴다면, 세계를 집으로 보는 생태론적 세계관은 자연을 존중하며 대하라고 권고한다.
세계의 인식 방식을 바꾸는 생태적 회심은 배타적 자기 증식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행동 양식을 거부하는 결단이기도 하다. 생태적 회심으로써 우리는 성장이 진보이고 발전이라는 성장 신화를 거부하고, 소비가 미덕인 소비사회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임을 확신한다(<찬미받으소서> 222항).
아무리 자본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이 지배한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을 벗어나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 자기를 절제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에게는 "탈아(ἔκστασις)의 법칙"이 내재한다(프란치스코, <모든 형제들> 88항). 절제와 배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희생되는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배려하는 단순과 검약, 호혜와 환대의 삶으로 구현된다. 절제와 배려의 태도를 수반하는 생태적 회심은 폭력적인 소비문화를 돌봄의 문화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에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