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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 오후 창원노동회관에서 열린 "미얀마 이주노동자 피예이 타엔 산업재해 노동자장."
10일 오후 창원노동회관에서 열린 "미얀마 이주노동자 피예이 타엔 산업재해 노동자장." ⓒ 윤성효
 
지난 9월, 그 장례식장에는 상주가 없었다. 빈소가 이제 막 차려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문객을 맞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왼쪽 팔에 검은 줄무늬가 쳐진 완장을 두른 이는 없었다. 분향실 앞 안내 전광판에는 그의 이름과 발인 날짜, 장지가 적혀 있었다. 상주를 적는 칸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4호 분향실은 작고 휑했다. 하얀 국화꽃이 놓인 제단은 소박했고 작은 향로에는 향초 몇 개가 연기를 내며 꽂혀 있었다. 합동 조문을 하려던 참이라고 했다. 작은 분향실에 사람들이 가득 찼고 그 틈에 끼어 고인에게 술잔을 올렸다. 조문을 마친 사람들이 식당에 무리 지어 앉았다.

작은 분향실 바깥에는 커다란 근조화환이 순서대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건설사 등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열 개쯤 되는 화환들은 자리가 부족한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문구는 다른 화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고인의 이름은 장례식장에 도착해 처음 알았다. 안내 전광판에 적힌 그의 이름을 보고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정사진 속 그는 짙은 파란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백팩을 메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찍은 듯했고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영정으로 쓰려고 찍은 사진이 아니었고, 누가 봐도 아주 젊어 보였다.

사고라고 했다. 함양에서 울산까지 잇는 고속도로였고, 그는 합천호 나들목 건설 현장에서 신호수로 일했다. '공사장 주변의 통행안전과 교통소통을 위해 배치'되는 신호수는 공사구간에 진입하는 차량을 통제하고, 작업 차량을 안전하게 작업장으로 유도하며 표지와 안전시설을 수시점검하는 일, 보행자 안전 확보 등의 일을 한다. 

사고는 건설 현장 안에서, 근무 시간에 벌어졌다. 덤프트럭이 신호수인 그를 보지 못했고, 그의 온몸을 깔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그를 깔고 지나간 트럭은 25톤이었다. 8월 7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성실하게 일하던 젊은 친구

그의 이름은 피예이 타엔(Pyay Thein). 2017년 9월에 입국했으니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온 지 딱 6년이 되었다. 고용허가제 E9 비자로 들어와 공장과 공사장을 오가며 일했다. E9 비자로 한국에 취업한 '외국인 근로자'는 최장 4년 10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하며 취업할 수 있다. 비자가 만료되는 2022년에 그는 미얀마로 돌아가 다시 대학에 다닐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복학도, 귀국도 하지 못했다. 쿠데타 때문이었다.

미얀마 군부가 20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쿠데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군정의 유혈진압으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해외에서 민주화 시위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미얀마로 귀국하는 즉시 연락이 끊겼고 사망했다는 소식도 끊이지 않았다.

피예이는 G1-99으로 비자를 변경해 한국에 남을 수 있었다. G1비자는 임시비자로 산재나 질병, 난민 신청 등 '인도적 사유'를 인정해 일정 기간 한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쿠데타 직후 미얀마 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받은 G1-99은 특별체류허가 비자로 다른 G1 비자와 달리 건설업에 한해 취업이 가능하다. 피예이는 비자를 받은 후에 주식회사 영인산업과 근로계약을 맺고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합천호 건설 현장 신호수로 일한 지는 6개월 되었다.

노동단체 등은 피예이 타엔의 사망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에 해당되는 사고라고 봤다. 산재사망이라는 사건의 무거움과 중요함을 경남이주민센터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는 잘 알고 있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이주노동자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다.

하지만 합의는 더디고 시간만 흘렀다. 누구보다 피예이 타엔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피예이가 일하다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화로 들었다. 대사관에서 연락이 오고 미얀마교민회에서도 연락이 왔지만 아들의 장례는 한 달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아들이 편히 떠나지 못하고 안치실에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을 보러 한국에 가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투쟁 조끼를 입은 상주들 

중대재해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본부를 비롯해 이주민센터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는 긴급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례를 안전하게 마치고 합의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모두 동의해 투쟁위를 꾸렸다.

민주노총 경남본부 등 '미얀마 이주노동자 피예이 타엔 중대재해 추모·장례 투쟁위원회'(아래 투쟁위)는 지난 9월 6일 원청업체인 계룡건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고인의 유족이 경남이주민센터, 경남미얀마교민회의 도움을 받아 장례 등에 대한 권한을 변호사에게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보상 문제에 난항을 겪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쟁위는 "원청인 계룡건설과 하청인 영인산업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다"고 지적하며, "심지어 사측은 고인과 관련해 유족 측 변호인 등에게 알리지 않고 화장장까지 예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은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고인은 살아서도 차별을 받았고, 죽어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목숨의 가치까지 다른 것 아니다"라고 비판했다(관련 기사 : "미얀마 이주노동자 산재 사망, 원청 계룡건설 사과하라"). 

이같은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다시 합의가 시작되었다. 결국 그가 사망한 지 한달이 넘은 9월 10일 빈소를 차릴 수 있었고, '산업재해 노동자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장례투쟁위는 최종 합의 이후 공식 해산했지만 매년 9월 10일을 ‘이주노동자 생명안전의 날’로 선포하고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일하다 죽지 않도록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장례투쟁위는 최종 합의 이후 공식 해산했지만 매년 9월 10일을 ‘이주노동자 생명안전의 날’로 선포하고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일하다 죽지 않도록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 중대재해 추모 장례투쟁위원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노동안전보건 국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예이 타엔의 장례식은 '연대투쟁의 결과'였고 그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동안은 산재 사망 사고가 일어났을 때 보상 문제를 사측 기준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장례투쟁으로 그 기준을 깼다는 것 역시 중요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는 없지만, 보상금이 국적에 따라 달라지고 죽음에도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을 투쟁위는 깨고 싶었고, 깨야만 했다.

연대투쟁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빈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조문 온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거기 있는 모두가 상주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조문 오는 이를 맞아주었고, 분향하기를 기다려주었다. 돌아가며 빈소를 지켰고 합의 문제와 다음날 있을 추모 문화제를 함께 준비했다. 투쟁으로 조문하고 연대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4호 분향실을 분주하게 오갔다. 피예이 타엔의 상주들은 팔에 완장을 두르는 대신 투쟁 조끼를 입고 있거나 노란색 팔찌와 무지개 뱃지 등을 옷과 가방에 달고 있었다.

일찍 빈소를 찾아온 피예이 타엔의 동료 M도 빈소를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피예이 타엔의 사고가 있던 날, M도 현장에 함께 있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상황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M은 말했다. 또 그는 피예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평소에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친구가 많고 사람 좋은 피예이는 통화를 정말 많이 한다고 했다. 게임을 좋아해서 평소에도 모바일로 자주 게임을 한다고도 했다.

그가 즐겨했다던 게임은 무슨 게임이었을까? 통화는 누구랑 그렇게 많이 했을까, 미얀마로 전화를 걸었을까? 영정사진 속 그가 서 있던 곳은 창원에 있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라던데, 거긴 자주 가는 곳일까?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한다는데, 뭘 하고 놀았을까?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더 묻지 못했다.

경찰서에서 보낸 영사기관 사망 통보서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간략한 사고 경위와 함께 그의 생년월일과 국적, 여권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과 통화를 자주 하고, 모바일 게임을 좋아하는 피예이 타엔은 1996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0월 5일은 그의 27번째 생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원문은 ssaram.co.kr에 실렸습니다.


#노동르포#싸우는노동자를기록하는사람들#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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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일로 밥벌이하며 르포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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