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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새뜸-미니 다큐] 젖은 땅의 숨결, 생명을 품은 합강습지를 가다 이 영상은 도심 속 한복판에 숨겨진 ‘야생의 공간’을 탐사한 4개월간의 영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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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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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땅. 항상 그 곁에 마르지 않는 물길이 있다는 뜻이다. 그 물이 마른 흙을 갈아 생명의 땅을 일군 곳. 지난여름, 나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나 홀로,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걷거나 보트를 타고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을 수시로 탐사했다. 캠코더와 휴대전화 사진기, 드론을 들고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는 합강습지를 찾았다.
이곳을 처음 안 건 1년여 전, 여름이다. 대청댐부터 금강하굿둑까지 자전거 종주를 하면서였다. 합강캠핑장에서 미호강 보행교를 지나 둑방길에 오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갈대숲은 온통 연두 빛, 그 위에 짙은 녹색의 버드나무 군락이 뭉게구름처럼 떠다녔다. 거대한 야생의 화폭 위를 유장하게 흐르는 미호강과 금강은 어미 닭이 알을 품듯 습지를 감쌌다.
자전거 안장 위에서, 불과 10여 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뒤에도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땅을 맨발로 밟으며 야생의 오래된 향기를 맡고 싶었다. 지난 6월 초부터 두 달 동안 세종시청자미디어센터가 진행한 초보자들을 위한 다큐 제작 강의를 들으면서 합강습지를 소재로 잡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경계의 생태계] 야생동물과 인간의 숨과 쉼이 살아있는 곳
합강습지는 금강과 미호강이 만나는 하천 생태계의 경계에 있다. 또 전월산과 같은 육상생태계와의 경계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과 산이 모이는 곳, 그 경계에 선다는 건 대립과 배제의 뜻이 아니라 이편도 되고, 저편도 되는 공존과 공생, 포용의 공간을 의미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에 생명체들이 모여들 듯이 작은 강과 큰 강, 강과 산의 경계에도 다양한 생태계가 펼쳐진다. 드넓은 버드나무 군락과 두 강이 합쳐지면서 공급하는 풍부한 수량, 마르지 않는 물웅덩이와 야생동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모래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숨'과 '쉼'이 보장된 땅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금강유역환경청이 지난 2018년 이곳을 '생태계 변화 관찰 지역'으로 지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셔널트러스트도 이듬해인 2019년 '이곳만은 꼭 지키자' 공모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당시 조사 결과 180 분류군의 식물과 234종의 육상 곤충이 이곳에 서식했다. 특히 수달, 삵, 흰목물떼새, 원앙, 금개구리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의 보고였다. 이에 금강유역환경회의는 2020년 이곳을 '세종 시민 습지 1호'로 지정했다.
지난 넉 달 동안, 나는 수시로 야생의 공간에 발을 들여놨다. 풀잎 위를 한땀 한땀씩 나아가며 꿈틀대는 애벌레는 티 없이 맑았다. 이방인이 들이댄 카메라에 놀라 그 자리에서 콧구멍만 벌름거리던 개구리와도 애타는 눈빛을 교환했다. 검은 날개 위로 노란 줄무늬를 한 노린재는 로마 병사 투구처럼 당당했다. 합강습지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은 것을 보여줬다.
도심 속 '비밀의 화원'에선 무슨 일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보는 풍광이 한 폭 수채화라면, 일상을 지배하는 속도를 늦췄을 때의 모습은 아주 얇은 자연의 붓으로 그린 세밀화였다. 생명이 만져졌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곳, 한 뼘 영토 안에도 다닥다닥 모여 숨 쉬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했다. 숨을 죽이면서 경이로운 삶을 영상에 담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흙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어? 방금 땅이 꿈틀거렸는데?"
혼잣말을 하고 되돌아가 살피니, 애기뿔 소똥구리 2마리가 고라니 똥을 구멍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검은 콩처럼 똥을 잘게 뭉쳐서 뒷발로 굴리는 녀석도 있었다. 핸드폰에 그 모습을 담다가 살짝 건드렸더니, 죽은 체하면서 누워 있다가 일어나 슬그머니 내뺐다. 순간, 이 녀석들을 잡아서 놀던 내 유년 시절이 소환됐다. 지금은 멸종위기종 2급 곤충이다.
습지는 혼자일 때보다 여럿이 함께 갈 때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아, 꼬리가 하나 잘렸네요, 이건 흰꼬리 명주나비입니다."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녀석은 사람을 본 적이 없던 탓인지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이 처장의 카메라에 붙어 있다가, 날아올라서 잠시 동안 그의 귀에도 앉아 천연덕스럽게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당돌한 생명체. 이 처장은 "나비도 사람을 알아본다"고 우스개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나비가 있다는 건 주변에 쥐방울덩굴이라는 희귀식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쥐방울덩굴이 있는 곳에만 나타나는 녀석들이죠."
그날 이 처장과 함께 내 키보다 더 높게 자란 갈대밭을 헤치고 다녔다. 경계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는 촉촉한 땅의 한가운데에 들어가니, 어렴풋하게나마 나도 이 거대한 생태계의 연결고리 속에 한 객체로 서 있다는 동질감이 들었다.
[젖은 땅의 축복] 홍수·가뭄 예방... 기후위기 시대의 탈출구
지난여름 홍수 때 합강습지는 통행금지 지역이었다. 온통 흙탕물로 뒤덮였다. 자전거 도로가 침수됐고, 대부분의 버드나무들도 물속에 잠기거나 정수리만 남겨놓았다. 이처럼 습지는 홍수 때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여 수해를 줄인다. 가뭄 때는 메마른 땅에 물을 조금씩 내어주어 해갈에 도움을 준다. 야생동식물의 터전이면서, 인간에게도 이로운 땅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빌딩과 건물이 둥근 도넛 모양으로 촘촘하게 들어서는 세종. 그 정중앙에 남은 합강습지는 뜨거운 도심의 온도를 1~2도 정도 낮춰 탄소 배출을 줄이는 소방수 역할도 한다.
"습지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점은 물의 정화 기능입니다. 특히 모래톱은 자연의 필터죠. 그리고 이곳에는 탄소 흡수원 역할을 하는 식물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식물들은 증산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열섬현상을 감소해 주죠."
지난 7월, 합강습지 생태조사를 벌일 때, 황성아 가람수풀생태환경연구소 대표가 한 말이다. 합강습지 모래톱의 소중함은 지난 9월 1일 진행된 '시민과학자 금강 어류 조사' 때도 확인했다. 멸종위기종 1급 어류인 흰수마자와 미호종개를 발견했을 때였다.
당시 조사 작업에 참여한 성무성 물들이연구소 소장은 "두 어류는 유속이 어느 정도 있고, 깨끗한 모래 여울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며 "4대강 보에 물길이 막혀 강바닥에 펄이 쌓였을 때는 사라졌는데 보의 수문을 열고 난 뒤에 되돌아왔다, 몇 해 전엔 세종보 아래쪽에서만 발견됐는데 서식지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관련기사]
멸종위기 1급 '흰수마자' '미호종개' 금강 서식지 확산
(https://omn.kr/25mmt).
[습지의 먹이사슬] 자연의 콩팥, 공생의 터전
누군가가 버린 것들이 누군가에겐 소중한 양식이다. 나눔, 그게 자연이다. 온갖 쓰레기를 이끌고 낮은 데로 길을 내는 강. 그 강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습지는 오염물질의 집합소이자, 거대한 먹이터이다. 자연의 콩팥, 습지에 이런 별칭이 붙은 까닭은 이곳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거대한 먹이사슬 때문이다.
지난 14일 세종환경운동연합이 합강습지에서 벌인 '수달 생태조사'도 인상적이었다. 조사단은 보트를 타고 습지와 금강이 만나는 지점을 탐사했다. 보트 위에서 본 습지, 눈높이를 달리하니 수달이 들락거리며 여기저기에 닦아 놓은 길이 보였다. 풀숲을 위장막처럼 덮은 수달의 굴도 발견했다. 80cm 되는 대형 잉어를 잡아먹다가 바위 위에 남겨둔 수달의 식탁도 있었다.
최종인 한국수달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은 수달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감탄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수달이 좋아하는 물고기는 블루길입니다. 아무 데서나 잡아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피가 작기 때문이죠. 수달이 자리를 잡으면 블루길, 황소개구리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녀석들이 싼 똥은 생선 향기가 진합니다. 냄새를 맡고 족제비나 너구리 같은 동물이 모여들죠. 수달이 먹다 남은 '왕건'을 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달은 이렇게 다른 동물들과 공생합니다."
[관련기사]
80cm 대형 잉어 꿀꺽한 '수달의 식탁' 무사할까?
(https://omn.kr/25rgh)
합강습지 곳곳에 남아있는 물웅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플랑크톤과 유기물질은 수서 곤충이나 물고기들의 먹이이다. 이들은 또 새나 개구리, 작은 포유류의 먹거리이다. 작은 동물들은 뱀과 삵, 수달과 같은 큰 동물들을 불러들인다. 습지의 먹이사슬로 걸러지고 젖은 땅에 흡수된 더러운 물은 깨끗한 물로 거듭난다.
[야생의 삶과 경관] 눈부신 눈꽃과 짙은 녹색의 밀림
겨울을 장식하는 눈꽃, 철새의 보금자리이다. 봄, 여름, 가을이 선사하는 짙은 녹색의 밀림, 경이로운 생태계는 사람에게 위로를 선사한다. 금강 햇무리교 위쪽의 전월산 기슭, 자전거 도로에 있는 일출 명소. 많은 라이딩족들이 그곳에서 잠시 멈춰선다. 그곳에 인간의 쉼과 숨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지난 8년간 이곳의 일출을 촬영하고 있다는 서영석 사진작가도 그랬다.
"세종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습지입니다. 이곳에 오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합강의 물안개는 장관입니다. 나무 사이를 흘러 다니는 물구름이 펼쳐지죠. 합강의 겨울은 상고대가 필 때가 최고입니다. 눈꽃이 피고, 눈꽃이 질 때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의 말처럼 합강의 겨울은 사람에게 빼어난 경관을 제공하는 데,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큰고니에게도 아주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 4~5km 금강 하류에 있는 장남들에는 매년 겨울 큰고니들이 날아온다. 멸종위기종인 금개구리 서식지로 보호받는 곳이고, 철새들의 먹거리를 위해 추수를 하지 않는 곳이다.
합강습지 어류조사에 참여했던 조성희 장남들보전시민모임 사무국장은 "두 물이 하나 되는 합강습지는 다양한 생태계가 형성된 곳이고 훌륭한 경관을 자랑하지만, 특히 겨울이 되면 인근의 장남들에 머물던 큰고니가 이곳을 왕래하며 먹이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와 오늘] 무분별한 골재채취, 그 상처의 흔적마저도...
하지만 합강습지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오래전 이곳의 드넓었던 모래톱은 아이들이 멱 감고, 아낙들이 빨래하고, 사내들이 물을 긷던, 인간의 쉼터이기도 했다. 대청댐 건설로 모래 유입이 차단되고, 금은 모래를 마구 파헤치며 골재를 채취했다. 지난 7월 합강 생태조사 현장에서 유진수 금강유역환경회의 사무처장은 이곳의 과거와 오늘을 증언했다.
"지금 저희가 있는 이 주변이 모래톱이잖아요. 금강의 모래와 미호강의 모래가 흘러 내려와서 쌓인 겁니다. 뒤쪽으로 보이는 달뿌리풀과 일부 억새가 있는 밭과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 2000년대 이전에는 다 모래톱이었어요. 예전부터 이곳에는 모래가 많이 쌓여서 토사 채취가 심했던 곳입니다. 4대강 사업 때도 준설을 했죠."
합강습지에 남은 커다란 웅덩이는 모래 채취, 그 상처의 흔적이다. 흉터에 딱지가 앉듯이 진행되는 육지화. 개발의 상흔인 웅덩이는 수서곤충과 야생생물들의 삶터로 변했다. 이곳이 다시 개발된다면, 개인의 전유물이 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대로 놔둔다면 자연의 시간은 치유의 순간, 그 연속이다. 야생생물과 인간, 모든 이의 공유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만은 꼭 지켜야 하는 까닭
급격히 도시화 되는 세종시. 지난 4개월 동안 '이곳만은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야생생물·습지생태 전문가, 환경운동가들이다. 이들이 수시로 걸음을 멈추는 건, 멈춰서야 볼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 하염없이 강물과 함께 흘려보내는 듯하지만, 습지는 자기 몸에 자기 생을 기록한다. 이 자연의 기록을 기록하는 일이 합강습지를 지키는 일이라고 이들은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합강습지에는 다양한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살고 있어서 습지 보호구역 지정을 위한 기본 여건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도심부 내에 습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경관적, 생태적 가치가 뛰어나서 습지보전등급 1등급 지역입니다. 습지보호지역 지정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그 이전에 서울 밤섬처럼 생태경관 보전지역 지정운동을 벌이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생태 조사, 어류 조사, 수달서식지 조사 등을 해 온 박창재 세종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의 말이다.
강은 낮은 데로 길을 낸다.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공존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그 길에서 만난 두 강이 전월산 기슭, 합강습지에서 잠시 쉬면서 뭇 생명을 살리다가 금강 천리길을 잇고 바다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