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9월 2~7일,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이 주관한 '일본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재일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학살 당한 대부분이 먹고 살 길을 찾아 현해탄을 건넌 일용직 노동자에, 부두 하역 잡부들, 그리고 그 식솔들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씨알(민초)이었을 뿐인데...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치른 5박 6일간의 추모제 동행기를 쓰고자 합니다.[기자말] |
9월 2일, 새벽 3시에 인천공항을 향해
일본에서 학살당한 조선인 6661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타야할 비행기는 일본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오전 7시 5분 발 제주항공이었던 터라, 집을 나선 건 2일 새벽 3시였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대 입구 정류장에 서는 새벽 4시 20분 첫 공항리무진도, 비슷한 시간대의 첫 지하철도 7시 5분 비행기를 타기에는 무리였습니다.
택시를 타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던 차에, 근처에 사는 씨알재단 김원호 이사장님이 "인천공항 장기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가자"고 했고, 새벽 3시에 신림동 제 집 앞으로 저를 데리러 오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새벽 2시에 스마트폰 알람을 맞춰 놓고는 혹시 못 들으면 어쩌나, 알람이 안 울리면 어쩌나 괜히 불안하여(날마다 새벽 5시에 나를 깨우는 알람이 왜 갑자기 시치미를 뗄까만) 그대로 깨어 지새다, 2시 50분에 준비를 마치고 집 앞에서 이사장님 차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큰 길도 아니고 주택가 골목에 노란등을 켠 빈 택시가 자주 오가는 것이 좀 놀라웠습니다. 누군가 예약을 했다는 뜻이니, 우리처럼 공항을 가는 것일까. 여행가방을 보고는 콜한 사람인 줄 알고 내 앞에 서는 택시가 있는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이사장님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3시 30분이 가깝도록 오시지 않으니 슬슬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약속보다 늦는 상대에게 독촉이나 확인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 약속한 3시로부터 30분이 지나도록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그날은 비행기를 타야하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간밤 10시 무렵 3시가 아니라 3시 30분에 픽업하겠다고 문자를 써 놓고는 전송버튼을 누르지 않으셨다고. 그랬으니 이사장님은 이사장님대로 "신아연이 왜 날더러 언제 오냐고 전화를 했지? 내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닌데..."하고 의아해하셨다고.
실은 강화도에서 또 한 명을 픽업하기로 했다며 새벽 3시에 출발하자고 하셨던 건데, 사당에서 신림, 신림에서 강화, 강화에서 인천공항까지 무려 3시간을 운전하신다는 게 연세 많은 분에게 너무 무리가 아닐까, 더구나 전날 눈도 못 붙인 상태일텐데... 하며 걱정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강화도에서 오는 사람을 강화도까지 데리러 가질 않고 김포 인근에서 만나는 걸로 변경, 30분을 늦추게 된 거라고.
"이 오이를 좀 먹어 봐. 농사지은 거야."
이사장님이 그 이른 시간에 반찬통에 오이를 가지런히 썰어 담아 오셨던 것이죠. 김이사장님은 대형 변리사 사무실 대표 은퇴 후 4년 전부터 양평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개인 농사로는 규모가 꽤 큰 편이지요.
나리타공항에서 케이세이 우에노역으로
나리타 제 3공항 풍경은 엄숙하다 못해 침울하기조차 했습니다. 공항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어 사진 없이 말로만 하자면 안내 표지나 문구가 온통 검은색, 그것도 지나치게 굵게 쓰여있었습니다. 6661명의 장례를 치르러 온 우리들을 공항에서부터 제격으로 맞아줬다고 할까요?
공항과 연결되어 있는 열차를 타고 우리가 일차적으로 가야할 곳은 케이세이 우에노역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거였지만 우리나라의 서울역이나 청량리역만큼 번잡한 역인데, 여기서 환승을 하여 관동대학살 추모 장소가 있는 야히로역으로 가야 합니다.
오전 7시 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전주에서 인천공항까지 밤을 꼬박 새웠을 씨알재단 이창희 사무국장과 아내 김윤수님, 재단 김원호 이사장님과 저, 양혜경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전 SBS 방송사 김양호 피디, 시민단체 참여연대 백미정씨 등 7명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곤봉 모양의 긴 장대를 들고 단 위에 올라서 보초를 서고 있는 공항 내 치안 담당 경찰관은 일본 강점기 '순사'를 연상케 해 약간 불쾌했습니다. 단 위에 올라서 있는 모습과 제복, 특히 모자가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주었는데 열차 안에서 마주한 안내원의 복장은 그보다 더 시대를 거꾸로 돌려놓은 모습이었습니다.
공항이 그 나라의 첫 인상이라 할 때, 저의 일본 방문 첫 인상은 어둡고 다소 고압적이며 경직과 질서 정연(이 지나쳐 숨이 막힐 것 같은 열차 내부), 제복에서 오는 빛 바램 등이었습니다.
제가 일본을 처음 가본 아주 촌스러운 사람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은 2시간 30분 밖에 안 걸리는 가장 가까운 나라지만, 호주와 일본은 거의 10시간 거리입니다. 호주에 살면서 일본을 간다는 것은, 한국에 살면서 호주를 가는 것만큼 큰 맘을 먹어야 하는 거지요.
26세에 결혼해서 거의 바로 호주로 이민을 간 저로서는, 그리고 그 당시는 지금처럼 해외여행을 유행처럼 다니던 때가 아니었으니, 제게 일본은 60년 만에 처음 가보는 멀고도 먼 나라였던 거지요.
* 다음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