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3일 목포의 공생원을 방문해 '한일 우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또 사회취약계층 위주의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는 이날 오후 전남 목포시 죽교동 공생원에서 열린 공생복지재단 설립 9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도 공생원이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는 것은 물론이고 한일 양국 우정의 상징으로 더욱 발전하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정부 역시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더욱 두텁게 지원하는 약자 복지를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한일 일한 친선협회 대표단을 접견할 때에도 공생원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이 공생원의 활동을 보고 목포에서 성장하신 김대중 대통령께서, 또 이 공생원을 일본에서도 잘 알고 계시는 오부치 총리가 있었기에 김대중 오부치 선언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공생원은 목수이자 조선인 선교사였던 윤치호 선생이 일제강점기인 1928년 설립했다. 여러 명의 고아들을 양자, 양녀로 키우다가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지향을 담아 보육원을 설립했다. 목포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였던 타우치 치즈코 여사는 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윤치호 선생과 결혼하면서 이름을 윤학자로 고치고 보육원 운영을 도왔다.
윤치호 선생은 한국전쟁 중 인민군의 진격에도 피난하지 않고 남아 공생원의 아이들을 지켰다. 인민재판에 회부돼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던 선생은 오히려 목포시 죽교동 인민위원장을 맡아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후 국군이 돌아온 뒤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에 잡혀가 3개월 간 심문을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고아를 돌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이념의 굴레가 씌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윤치호 선생은 1951년 1월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가 실종됐다. 이후부터는 윤학자 여사가 원장을 맡아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돌봤다.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린 윤 여사가 1968년 병으로 사망하자,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이 거행되고 3만 명의 조문객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관련기사 :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의 삶 http://bit.ly/PAqm3)
이날 기념식에는 김영록 전남지사, 박홍률 목포시장, 공생복지재단 직원 등과 에토 세이시로 자민당 중의원 의원, 쿠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공사 등 일본 측 관계자 100여 명도 참석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축사는 에토 의원이 대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