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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편집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⑦] 할머니 과수밭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https://omn.kr/262ne)에서 이어집니다. 
 
 이봉춘 할머니와 그가 작성한 서예
이봉춘 할머니와 그가 작성한 서예 ⓒ 김영희
  
이봉춘 할머니는 이상길 경남대 교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교수팀이 발굴을 시작하자, 할머니는 물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발굴장을 다니셨다. 이 교수는 매장지 관리에 관한 내용을 전해야 할 때마다 할머니를 한쪽으로 모시고 가서 비밀리에 이야기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발굴을 시작했지만, 2009년도만 해도 사회 통념상 유족들에게 안 좋은 소문이 들어갈까 봐 말 한마디도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찾아갔을 때도 할머니는 집에 요양보호사가 있다며, 다른 방으로 안내해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그 정도로 철저하셨다. 발굴을 마친 후 이 교수는 할머니를 초대해 간단한 제례를 지냈다.

"유해를 실은 영구차에 주렁주렁 달린 돌감나무와 과수원 주변에 있는 꽃을 한 아름 꺾어서 유해에 대한 마지막 작별의 예를 올렸어요. 그때 이 교수가 내 머리 위에 얹어있는 지푸라기를 때어줬어요. (웃음). 교수님은 성격도 좋으시고 참 다정한 분이었다고 꼭 뵙고 싶어요."

그러면서 또 하나의 사연을 공개한다. 

"발굴장 건너편의 법륜사라는 절이 있어요. 그곳 스님께서 밤이 되면 건너편 학살지 골짜기에서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매일 들린다며 억울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어요.

어느 날 꿀 장수가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저녁이 되니까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래요. 그 뒷날 동네 사람들한테 저 안쪽에 동네가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니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와서 두 사람씩 결박 상태 자세로 손이 묶인 채 머리가슴에 총구멍 뻥뻥 뚫려서 붉은 피 쏟아지진 계곡에 원한의 목소리가 울렸거늘 어찌 조용하겠는가. '산 자여! 우리 여기 있소! 어서어서 찾아 영혼이라도 달래주시오'라는 메아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진성고개 발굴장은 세 지점이 있다. 추정되는 피학살자는 150명 정도다. 학살지 있는 곳곳에서는 '악독한 사람들이 학살지를 몰래 찾아가 머리뼈만 골라 포대기에 담아 간질병 고치는 데 팔아넘겼다'는 일화가 종종 들린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찌 사람으로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정말 독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다른 매장지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라고 했더니 "아이고! 그래요"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길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런 고마우신 할머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따뜻하고 다정하셔서 마음이 푸근했다. '할머니 가끔 찾아뵐게요' 하니 웃으시면서 "바쁜데 무엇 하려고" 하면서도 "나를 찾아오는 건 선생님 마음이지요" 하신다. 그때 할머니가 "교수님은 잘 계시는가요? 한번 뵙고 싶어요"라고 하신다.

필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 교수의 묘지 사진을 보여드렸다. 순간 할머니 얼굴이 우울해지면서 깜짝 놀라신다. "왜 그렇게 좋으신 분이 아직 젊으신데 빨리 돌아가셨냐"며 할머니는 대화 중 몇 번이고 이 교수님에 관해 물으셨다. 결국 필자와 할머니는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

"할머니, 교수님 묘비가 진주 대곡 삼강문화재연구소에 있습니다"
"아! 그래요. 교수님 묘지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할머니, 진짜 교수님 묘지에 가시고 싶으세요?"
"그래요!"


"우리 손녀가 경남대학교에 다녀 이 교수를 찾아갔었어요. 그때 이 교수가 '내가 진주 가면 할머니 꼭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해서 3년 동안 교수님을 기다렸는데 안 오셨어요."
"아! 그러셨습니까! 지금은 겨울이라 추우니 내년 봄에 꼭 모시고 (이 교수 묘지에) 갈게요."


이 말에 할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가 내년 봄까지 살아있을까"라고 하신다. "할머니 당연히 살아계셔야죠"라고 인사를 하고 할머니 댁을 나섰다.

몇 개월 후, 할머니께 연락드려 이 교수한테 갈 수 있겠냐고 여쭤봤다. 아드님이 거동도 불편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정중히 거절하여, 결국 봉춘 할머니는 이 교수를 참배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정성, 발굴을 수월하게 하다

발굴 조사 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시굴 조사 작업을 실시한다. 여러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여 시굴하게 된다.

59년이라는 세월과 자연재해로 인한 지형의 변화에 따라 증언자는 꼭 여기가 맞다고 하지만, 실제로 시굴해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증언에 완전히 의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곳저곳 시굴해야 하는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진성고개 발굴은 3지구 중 1지구는 할머니의 제보로 아주 쉽고 정확하게 발굴이 시작될 수 있었다. 2지구도 시굴이 어려웠고, 3지구는 실패로 끝났다.

1지구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께서 원상 그대로 유지하고 관리해 왔기에 발굴 작업이 쉬울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한 결과, 야트막하게 15m 이상 길게 뻗어 내린 흙더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뻗은 흙더미를 중심으로 횡으로 몇 개의 트렌치를 설정하였다. 표토를 살짝 제거하니 초기 단계에서 높은 부분 위치한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해는 길이 13.5m, 최대 폭 4m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때문에 패인 얕은 골짜기에 매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노출된 54구(경사면 높은 쪽에서부터 1열 8명, 2열 7명, 3열 4명, 4열 4명, 5열 6명, 6열 6명, 7열 8명, 8열 6명, 9열 5명) 유해는 모두 전신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결박 자세가 뚜렷하게 노출된 유해
결박 자세가 뚜렷하게 노출된 유해 ⓒ 전국민간인학살 전시장
  
 학살 당시 결박 자세 재연
학살 당시 결박 자세 재연 ⓒ 김영희
 
그리고 2명씩 짝을 지어 손목을 뒤로 묶였는데, 두 사람이 팔이 서로 결박 자세로 손목을 묶은 것이 특징이다. 손목을 묶었던 재료는 출토되지 않았다. (증언에 의하면 죄수복을 찢어 만든 천으로 묶었다.)

아랫법륜골 매장지는 둔덕에 사람을 엎드리게 한 상태에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학살의 순서는 1열~9열로 한 줄씩 차례대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탄피의 수로 보아 1명당 1발씩 정조준하여 쏜 것으로 추정된다. 유해들은 대체로 20~30대의 남성들로 파악되었고 여성이나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진주지역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대부분은 진주형무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허리띠 11점, 버클, 38짝의 구두, 작업화, 지퍼 등이 출토됐을 뿐 재소자가 입었던 죄수복으로 판단할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진성고개에 매장된 사람들이 재소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적어도 25명 이상이 민간인 복장임이 확인되었다. 즉, 학살된 사람들은 진주형무소 재소자가 아니라 보도연맹과 관련해 예비 검속된 민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스란히 드러난 학살 과정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 ⓒ 김영희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 ⓒ 전국민간인학살 전시장

진성고개(아랫법륜골) 발굴장에서 노출된 유해의 위치와 형태가 잘 보존돼 있어서 가해자들의 학살 과정과 행위 절차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해자들은 피학살자들을 2명씩 짝지어 1열~9열까지 횡렬 시켰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왼쪽에 엎드린 사람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오른쪽에 엎드린 사람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약간 마주 보게 했다. 

피학살자들의 팔을 뒤로해 X자 모양으로 교차 되게 한 후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엎드리게 한 뒤 뒤에서 총을 쏘았다. 총을 맞은 신체 부위는 상체가 많은 편이며, 이 중에는 머리에 총을 맞아 머리뼈가 부서진 경우도 상당했다.

가해자들은 높은 쪽의 흙을 긁어서 시신을 덮었다. 이들을 시신을 덮는 과정에 마을 주민들을 동원했다. 아랫법륜골은 문산 주민을, 웃법륜골은 진성주민을 동원하여 매장 묻는 부역을 시켰다.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해자들의 집단학살 행위와 매장지 은폐다. 그러나 진성고개(아랫법륜골)는 지극 정성으로 매장지를 관리해 온 이봉춘 할머니 덕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해자(군인, 경찰, CIC)들의 집단학살 행위와 매장지 위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유일한 매장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발굴장에는 유해 노출 상태가 얽히고설켜 가해자들의 행위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 유품, M1 소총이나 카빈총의 탄환 개수에 따라 몇 명을 사살했는지 짐작한다. 그러나 이곳은 유해 형태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해 조사와 기록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봉춘 할머니의 온정 덕분'이 아닐지 싶다.

전국으로 발굴 지역을 다니면 암암리에 매장지를 아는 분들이 많다. 학살 후 군인과 경찰은 대부분 뒤처리를 동네 이장에게 명령한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매장지를 덮고 묻는 작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네 분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빨갱이 새끼들은 죽어도 싸, 죄인이고 흉측한 일을 했는데 이제 와서 왜 파느냐"고 하는 훼방꾼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매장지를 직접 제보하고 2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조상처럼 관리했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야 할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용서와 화해 아니겠는가.

또한 이 교수가 봉춘 할머니를 고마운 분으로 논문에도 남긴 것은 바로 봉춘 할머니를 향한 온정 아니겠는가. 이봉춘 할머니! 고상한 할머니! 고마운 할머니! 멋진 할머니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 하세요.

진성고개 유해를 만나다

진주 문산 진성고개 발굴장 Ⅰ구역(아랫법륜골)에서 54구, Ⅱ지구(웃법륜골)에서 57구, Ⅲ지구(까치골)은 실패, 모두 발굴한 111구의 유해는 현재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되어있다.

필자는 2021년 11월 2일,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1240구) 안치식에 다녀왔다. 그때 진성고개 유해를 만나고 싶어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유해 안치실을 보기로 했다.    

"멀리서 오셨네요. 진주유족회는 멀어서 못 와 매년 우리가 제사를 지냅니다."
"예!"


그리곤 안치실 문을 열어주며 "이쪽 라인과 이쪽 라인이 진성고개 유해입니다"라고 하신다.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진성고개 유해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진성고개 유해 ⓒ 김영희

유해 안치소를 둘러보자, 기분이 묘했다. 진주서 여기까지 와 계시는구나! 그리곤 경남대학교 박물관 E-4 등 유해 표지를 보는 순간, 이 교수가 생각이 났다. 이렇게 잘 발굴하셔서 여기에 보내셨구나! 이 교수를 뵙는 듯했다.

사실 진주유족회 측에서는 진성고개 유해(111구)를 진주로 모시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부와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9회 진주 화령골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진성고개#이봉춘 할머니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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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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