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재외 한인동포 3만 명이 모이는 행사가 열렸다. 21회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였다. 이 행사의 원래 이름은 '세계한상대회'였는데, 중국인들의 화상대회를 연상시켜 이름을 바꿨다. 이 행사와 함께 멀지 않은 LA에서 열린 한인축제와 조화를 이룬 의미있는 행사였다.
필자가 재직하는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는 서울경제진흥원이 운영하는 부스에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홍보하는 기회를 얻었다. 10여 일간의 출장을 통해 주마간산이지만, 미국의 변화 등 강한 느낌이 들었다. 세 차례에 걸쳐서 미국에서 느낀 세계 헤게모니 쟁탈전과 그속에서 한국의 위치 등에 관한 고민을 정리한다(1회, 미·중 헤게모니 경쟁, 2회 빛나는 재외 한국인의 역사, 3회 한국의 미래 먹거리는 무엇). [편집자말] |
미·중 헤게모니 전쟁이 부른 미국의 위기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를 철수한 다음날인 10월 15일 아침,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우버를 타고, 할리우드를 보기 위해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도착했다.
기사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돌비극장에서 좀 거리가 있는 판타지스극장(Pantages Theatre) 앞. 본격적으로 관광객이 몰리기 전인 오전 9시인데, 거리에는 홈리스들이 적지 않게 눈이 띄었다.
스타들의 손도장이 있는 TCL 차이니즈 시어터로 향하는 데, 민간 경찰이 급하게 무전을 치고, 한 행인이 길 옆에 있는 홈리스의 목을 짚어 호흡을 확인하더니 죽었다고 말했다. 난 차마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지만 일행은 홈리스의 얼굴이 이미 파랗게 변했다고 전했다. 잠시 들른 거리에서 사망자를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만나는 교민들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을 전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600km 떨어진 산호세에 있는 스탠포드대학에서 박사 후를 마친 우신씨도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행사장을 찾아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베이징에서 중국 대사 비서를 했던 우신씨는 얼마전 친구의 차를 포함해 6대의 차량이 도둑 맞았던 상황을 말하면서 치안 부재 상태를 말했다. 특히 절도를 해도, 1000달러 정도의 보석금을 내면 되는 상황이라, 불법적인 상황은 멈추지 않고, 자신도 가족의 안전을 생각해 남 캘리포니아로의 이사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호세는 물론이고 LA 등 대도시는 대부분 이런 상태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로스앤젤리스 스키드로우 거리는 세계 10대 우범지대라고 자조하면서 하나 같이 좀 안전한 다른 도시의 이주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치안이 심각해진 것은 앞서 말한 처벌도 문제지만 펜타닐로 시작된 마약 중독 문제도 큰 원인이다.
미국 제약·의료계의 '모럴 해저드'로 촉발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문제는 1년에 수만 명이 자·타의로 사망하는 상태를 빚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펜타닐 처방을 막는 조치를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다. 대부분의 교민들도 이 문제로 인해 트럼프의 재집권을 예견하는 상황이었다.
미국 상황의 심각성은 경제문제에도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인해 미국 내 물가는 하루가 다르고 치솟고 있는 상황이라는데 입을 모았다. 미국 공산품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중국의 역할에 제동이 걸리자 미국 내 물가는 전반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엄미영 사장도 이번 한인비즈니스대회를 찾았는데, 서부 지역이 최근 30% 정도 물가가 올랐다면 내륙 쪽은 50%가량 오른 인상이라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말했다.
잠시 시간을 내서 4년만에 쇼핑 명소 시타델 아울렛을 찾는 기자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기회에 가격이 낮다면 운동화를 좀 살 마음으로 전문 매장을 찾았다. 살 제품을 한국에서 찾아서 가격을 기록한 상태였다. 필요한 운동화는 이 아울렛 매장에서 240달러의 가격이 붙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판매가격은 20만 원 정도였다. 계산할 때 붇는 봉사료까지 포함하면 1/3이상 비싼 상황이었다. 결국 쇼핑을 포기했다.
시타델 아울렛의 경우 중국 왕홍 들도 직구 활동을 많이 하는 곳인데,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한 팀만 행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국 내 물건의 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당연히 미국의 무역제재가 자리한다. 관세의 상승은 물론이고 통관이 어려워지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미국을 경유할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중국이나 동남아에 있는 공장에서 각국으로 물건을 보내는 방식을 채택하는 만큼 미국의 역할을 줄고, 미국 내 매장의 가격도 올라간다.
특히 이전에 10% 정도였던 봉사료도 이제는 15~30%가 붙으면서 팁 프리미엄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우버 택시를 이용한 후에도 같은 봉사료를 내야 했다. 이런 상황은 바이든 정부 등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텔레비전을 틀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CNN 등 뉴스 전문 채널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전쟁을 보도하고 있었다. 필자가 미국에 있던 14일에 일리노이주 플레인필드의 한 마을에서 71세 남성이 6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살해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범죄가 얼마나 골이 깊은 지를 쉽게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미국에게 이스라엘 전쟁은 또 다른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이 적국으로 상정한 중국은 안팎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역시 행사가 벌어지고 있던 12일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이 기존 슈퍼컴퓨터보다 1경 배 빠른 양자컴퓨터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중국과학기술대학 양자 물리학자 판젠웨이와 루차오양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중국과학원 산하 상하이 마이크로시스템 등과 협력해 '지우장 3.0'이라는 이름의 255광자 기반 프로토타입 양자 컴퓨터 구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연구 결과도 미국 물리학회가 발간하는 국제학술지인 '피지컬리뷰레터'에 발표했다. 양자컴퓨터의 상용화는 세계 과학주도권을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인데, 중국이 이 부분에서 한 발 앞서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세계대학 순위에서 중국 대학 들이 미국을 넘어선 것은 이미 낯선 일이 아니다.
중국 내부에서 조차 3연임으로 적지 않은 반감을 산 시진핑 정부는 미국을 적으로 상정해 더 안정을 찾아가는 상황이다. 올 4월에는 일대일로의 남쪽 구간인 중국 윈난성 쿤밍과 라오스 비엔티안간 고속 여객 열차를 개통했다. 비가 많은 쿤밍과 비엔티안 구간은 화물차가 적지 않게 다니는데, 기존 도로가 낡아 사흘 넘게 걸리고, 사고도 많은데, 열차 개통으로 10시간(국경 입국 수속 2시간 포함)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이 협상자 역할을 할 수도
위험은 분명히 보이지만 미국이 가진 힘도 분명하다. 한 반미주의자 시인이 미국을 다녀온 뒤 "이 사람들을 보면 곧 무너질 것 같은데, 이 땅을 보면 100년은 끄덕 없어 보인다"는 말은 여전히 다르지 않다. 필자를 안내한 재미교포 차상오씨는 확신있게 말했다.
"미국의 현 상황을 보면 당연히 위기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만 봐도 미국의 잠재력이 얼마나 무한한 지 알 수 있다. 골드러시의 도시인 캘리포니아는 이후 석유와 농업을 거쳐서 대학으로 부자가 됐다. 지금도 건초 등으로 쓰이는 알파카는 물론이고 밧데리 산업, 신재생에너지 자원을 갖고 있어서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한인비즈니스대회 후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이동하는 길에 구글 등이 운영하는 아이밴파 태양광 발전소(Ivanpah Solar Power Facility)를 봤다. 모하비 사막에 건설 중인 이 발전소는 세계에서 제일 큰 태양력 발전소다. 2010년에 건설을 시작한 이 발전소는 총 세 개의 타워로 구성돼 있으며, 1400ha에서 392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일조량이 좋은 만큼 전력생산은 전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밧데리 산업에 필요한 리튬 등도 많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과 중국 모두가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한 만큼 뒤로 물러서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 중간에서 협상을 주도해줄 세력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라면 일본이나 독일 등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어느 나라도 신뢰를 해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를 보면서 한국이 주도적이지 않지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라는 가능성도 봤다. K-컬처로 인해 미국에서 한국의 인기는 시들지 않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미국인들도 한국 말이 들렸을 때, 비교적 온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미교포들은 문화로 인해 한국 음식 등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상대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는 데 목소리를 모았다.
미국 내 한인들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바인시 시장을 지낸 강석희 미연방총무조달청장을 비롯해 수많은 재미동포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70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들 가운데 17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한다. 특히 LA 등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100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프레드정 풀러턴시 시장 등 다양한 한인 정치인들이 있다. 미국에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진다.
다만 현 정부가 일방적인 한미일 공조를 주장하는 상황이라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국이 가진 외교적 위상을 알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의 역할도 기대하는 상황이다.
이번 출장길에 가져간 김성곤 교수의 <이어령 읽기>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는 대륙 세력을 대표하는 중국과 해양 세력을 대표하는 미국이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고래들 싸움을 중재하는 돌고래 같은 길을 선택하라고 한다. 민주당 경선에서 낙선한 이낙연 전 총리도 <대한민국 생존전략>에서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것만이 우리 외교의 전부가 아니라며,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고래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 있는 돌고래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