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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 호에는 옛 시민회관 쉼터에서 주안염전 자리까지 추억을 따라 걸었다. 산업화로 아스팔트 덮인 그 길엔 제 몸이 토양이고 뿌리인, 들꽃 같은 사람들의 일상이 피어나고 있었다.[기자말]
 2500만 수도권 시민의 발이 돼주는 주안역
2500만 수도권 시민의 발이 돼주는 주안역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가을 아침, 눈부신 빛살을 헤치고 달려온 전철이 사방으로 승객들을 풀어놓는다. 팍팍한 출근길을 함께 달려온 이들은 역전에서 저마다의 길을 나선다. 그 분주함이 도심의 나른한 아침 공기를 깨운다.

2500만 수도권 시민의 발이 지나는 주안역.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 뒤에는 역사를 지키는 특별한 이들이 있다. 새벽 첫차부터 마지막 전철이 운행을 마치고 모든 도시가 잠든 시간에도 역무원들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삼교대로 근무합니다. 첫차 운행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역사의 불을 켜고, 다음 날 새벽 전철이 끊긴 후에 일과가 끝납니다. 그래서 역무원들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할 수가 없어요."

오늘도 첫새벽에 하루를 시작한 고명주(57) 역장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국철 1호선과 인천지하철 2호선이 교차하는 주안역엔 유난히 환승객이 많다. 환승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걸음을 재촉하던 승객이 넘어지는 사고가 종종 목격된다. 교통체증도 없는 전용 레일을 달려 목적지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데도 승객들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다들 무엇에 쫓기듯 발걸음이 빨라요. 자신의 꿈, 약속,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부지런히 사는 거겠죠."

새벽을 깨우며 출근하는 행진이 한풀 꺾일 즈음 전철은 등교하는 대학생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남광장 버스 정류장이 금세 '인하대행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고속전철에 몸을 싣고 하루를 시작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늘도 주안역을 지나쳐 간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이고 지고.
 
고속전철에 몸을 싣고
하루를 시작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늘도 주안역을 지나쳐 간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이고 지고.
 
 주안역의 가을 아침 풍경
주안역의 가을 아침 풍경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전철이 숨을 토해내면 출근길, 등교길을 함께 달려온 이들이 저마다의 길을 나선다.
전철이 숨을 토해내면 출근길, 등교길을 함께 달려온 이들이 저마다의 길을 나선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역전 사람들

주안역은 2000년대 초까지 유동 인구가 하루 평균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될 만큼 번화했다. 주안역 일대 상권은 대표적으로 전철역 지하상가 상권, 주안의 유명 예식장인 고려웨딩홀 뒤편에 형성된 2030거리 상권, 학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문학원(옛 한샘학원) 상권, 주안역 후문 상권으로 나뉘었다.

먹고살기 위해, 놀고먹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도시화의 옷을 입은 주안은 한동안 인천의 새로운 '핫플'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신도시의 확장과 코로나19의 여파로 흥청거리던 거리에 적막감이 돌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진다. 한산한 거리를 걷다 길가 구둣방에 슬그머니 손님처럼 들어앉았다. 구둣방 주인은 주안 역전의 흥망성쇠를 15년 동안 지켜봤다. "여기가 명당이었어요. 주안에서 제일 큰 결혼식장 앞이라 당시 400만 원 주고 들어왔어요."

주말이면 식장을 찾은 하객들이 구두에 광을 내려고 수십 명씩 줄을 섰다. 고려웨딩홀, 주안C&C 등 사방에 결혼식장이 많았다. 오늘 식장들은 간판을 바꿔 달았고, 요즘 사람들은 양복에도 운동화를 신는다. "그래도 행복하고 만족해요. 이거면 내 용돈벌이는 해요." 주름진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핀다.

이번엔 현수막을 임시 간판으로 내건 과일 가게가 시선을 잡아챈다. '농부의 정성'이란 이름처럼 최주환(56)씨가 정성스레 잘 익은 과일을 골라 윤이 나게 닦은 뒤 매대에 진열한다.

"큰 마트에서 총괄책임자로 10년 넘게 일했는데, 주인이 바뀌니 눈치를 주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길거리로 나왔어요.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오겠죠." 그가 환하게 웃는다. 오래된 도심엔 여전히 '희망'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품은 사람들이 들꽃처럼 살아가고 있다.
오래된 도심엔 여전히 '희망'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품은 사람들이
들꽃처럼 살아가고 있다.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역전 상인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주안역전 2030거리의 한낮 풍경
주안역전 2030거리의 한낮 풍경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변화의 물결

Since 1987. 노란 간판이 시선을 붙잡는다. '문화칼라 사진관'은 세월의 부침을 이겨내고 36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반 가정에 필름 카메라 보급이 확대됐던 1987년, 작은 필름 현상소로 문을 열었다. 50㎡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시작한 문화칼라 사진관은 330㎡ 규모의 다양한 세트장을 갖춘 사진관으로 성장했다. 어머니 김명숙(70)씨는 디지털화라는 큰 변혁을 아들과 함께 넘었다. 

"우리 아들은 본래 화가를 꿈꿨어요. 붓 대신 카메라를 선택해 준 아들에게 늘 고맙죠." 김규동(41) 대표는 부친 고 김철한씨의 뒤를 이어 사진관의 2대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결단력과 실행력을 꼭 닮았다. 2000년대 초 아버지는 필름 현상만 하던 '동네 사진관'에서 '촬영 스튜디오'로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장이 또 한 번 요동쳤다. 문화칼라사진관은 다양한 콘셉트의 촬영 세트를 도입해 사진의 품질을 높였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공부한 김규동 대표의 실력이 빛을 발했다. 최근엔 보디 프로필, AI 프로필, 셀프 포토 등 '인생샷'을 남기기 위한 시장의 요구가 다양하다.

"위기가 많았지만 좋은 날이 더 많았어요. 사진사는 행복한 직업이에요. 사진관엔 웃음소리가 넘쳐요. 사람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기록에 담는 곳이니까요." 오늘은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매일 사진에 담아낸 사람들의 표정과 꼭 닮은 모습으로.
 
 옛 시민회관 쉼터에서 걸어 내려가며 바라본 주안역
옛 시민회관 쉼터에서 걸어 내려가며 바라본 주안역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갯고랑 동네의 기억

1910년 10월 21일, 염전 마을에 '수탈의 레일'이 깔렸다. 일제강점기 때 경인선은 주안 천일제염업의 수송 라인 구실을 했다. 이후 1960년대 복선화, 1974년 전철화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주안역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자리에 염전이 있었다. 지금은 공단이 자리 잡고 있다. 주안국가산업단지. 한때 국내 소금 생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염전이 1960년대 후반 산업화와 수출 진흥을 위해 공업단지로 변모된 곳이다.

평생 도심 곳곳의 변천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오인영(78) 사진작가는 인천 곳곳의 물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인천대 옆을 지나 지금 주안공단까지 갯고랑이 길게 져 있고, 주변에 염전 창고가 뜨문뜨문 있었지. 지금 토지금고 사거리도 예전엔 바닷가였고, 작은 염전이 하나 있었어. 1970년대 토지 구획정리 전까지 물길이 많았어요."

돌이켜보면 도심 곳곳에 신비로운 풍경이 참 많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경인국도 좌우는 논과 밭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의 문화 창작 지대를 예쁘게 꾸며놓은 인천지하철 2호선 시민공원역 주변은 2000년까지 시민회관이 자리했고, 그전에는 논이자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다.

오 작가는 1964년 인하공전 신입생 시절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인천을 기록했다. 갯고랑 동네에서 번화가로 변신한 땅의 역사가 그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애틋하고 마음 아프지. 세월을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노작가는 22년째 미추홀구사진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를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정기전도 지속하고 있다. 물줄기는 땅에 묻히고, 산줄기는 파헤쳐지고 도로가 뚫렸지만 회색빛 아스팔트 위엔 여전히 제 땅을 사랑하는 들꽃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주변은 많이도 변했지만,
회색빛 아스팔트 위엔
여전히 제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들꽃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의 휴대전화 속 시민회관 옛모습 사진
그의 휴대전화 속 시민회관 옛모습 사진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 ‘틈 문화창작지대’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 ‘틈 문화창작지대’ ⓒ 유승현 포토 디렉터
 
 평생 도심 곳곳의 변천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오인영 사진작가
평생 도심 곳곳의 변천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오인영 사진작가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주안국가산업단지. 한때 국내 소금 생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염전이 1960년대 후반 산업화와 수출 진흥을 위해 공업단지로 변모된 곳이다.
주안국가산업단지. 한때 국내 소금 생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염전이 1960년대 후반 산업화와 수출 진흥을 위해 공업단지로 변모된 곳이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인천#인천여행#주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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