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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만일 노예가 그 앞에 서 있다면 반드시 진심으로 슬퍼하고 분노해야 한다. 진실로 슬퍼함은 그의 불행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분노하는 것은 그가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루쉰)

"백인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흑인 스스로의 열등감이다. 복수하지 않고도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릴 방법은 흑인 스스로 권리의식을 찾는 길이다."(마틴 루터 킹)

우리나라 4천여 년의 긴 왕조시대의 지배구조는 거칠게 재단하면 양반과 상민으로 가닥되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봉건전제 시대의 공통적인 사회구조이기도 했다. 좀 더 세분하면 피지배층은 중인·천민·백정 등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피지배층이 학정을 견디다 못해 봉기하게 되면 지배층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의미에서 '난(亂)'이라 불렀다. 묘청의 난, 홍경래의 난, 제주민란, 진주민란, 이필재 난, 임꺽정의 난, 갑오동학 난 등이다. 1894년의 대규모적인 동학농민난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정명(正名)을 획득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앞서 소개한 고려·조선조의 각종 난(민란)도 민중항쟁의 주권행사였다. 이제라도 정명을 찾아 불렀으면 싶다.

임꺽정의 항쟁은 1559년(명종 14)에서 1562년(명종17) 1월까지, 3년 간에 걸쳐 황해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살해되었지만 지역적으로는 황해도뿐만 아니라 경기도·평안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에까지 파급되고, 부패 관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민심을 얻음으로써 많은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의 무리에 협조하여 관군의 진압이 쉽지 않았다.

임꺽정에 관한 기사가 <명종실록>에 수십 차례 나오고, 각종 정보가 그쪽으로 흘러들어가자 조정에서는 비밀회의를 하게 되었으며, 체포 명령을 받은 황해도 순경사와 강원도 순경사가 범인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체포해온 임꺽정은 조작임이 판명되었다."(실록, <명종 16년 신유, 1561> 기사)

"도적의 두목 꺽정이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모아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더니, 심지어 관군에 대적하여 왕사(王使)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라를 배반한 도적으로 이보다 더한 자가 없으므로 순경사를 특파하여 부월을 들고 위엄을 보이게 한 지 얼마 안 되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았다고 복명하니, 천심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게 의군부가 추국한 말을 들어보면 그가 꺽정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1561년 명종 16. 1월 7일)

'의적 임꺽정'의 실체보다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임꺽정은 누구인가. 왕조시대 반란의 두목은 제1호의 금기 대상이다. 때문에 그들의 '죄상'은 실록을 비롯 각종 관찬 사서에 살벌하게 나열되지만, 인물의 실상은 베일에 쌓인 채이다. 민중들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수법이었다.

여기저기에 산재된 기록을 취합하면, 그는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언제부터인지 황해도로 옮겨 소잡는 백정 노릇과 버들가지를 묶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임꺽정에 대해서는 백정이라는 것만 알 뿐, 도우(屠牛)를 직업으로 했는지, 유기장(杻器匠)을 직업으로 했는지는 불명하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황해도의 봉산·재령 등에는 갈대밭이 많이 보여, 이 갈대밭에서 갈대를 채취하여 삿갓과 밥그릇을 짜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갈대밭 지대가 임꺽정의 반란지역과 부분적으로 겹치고 있는 점, 봉산이 반란의 중심지로 되고 있던 점에서 추측하면, 임꺽정도 황해도로 이주하여 갈대로 삿갓이나 밥그릇을 제조하는 데 종사했을 가능성도 컸다고 생각된다. 이 추측이 옳다고 한다면, 임꺽정은 유기장의 백정이지만, 그 기술을 살려 황해도에 이주하여 갈대를 엮어 삿갓과 밥그릇 등을 제조·판매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시택강우(矢澤康祐)), <임꺽정의 반란과 그 사회적 배경>)

임꺽정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성격이 급해 부모가 걱정이라고 하다가 아예 '꺽정' 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에 훈구파가 세력을 얻고 명종 때 외척이 권세를 부리면서 부정부패가 극에 이르렀다. 이들의 축재행위는 민중의 생활에 큰 피해를 가져오고 백성들은 유리걸식을 하거나 산적이 되었다.

내수사와 훈구파에 의한 사적 소유지 및 농장의 확대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행해지면서 지방 중소지주와 농민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반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권세가의 노비로 몰락하였으며 중소지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노비의 도망과 탈취가 큰 타격이었다.
 
 SBS 드라마 <임꺽정> 중 한 장면(1997년 방영)
SBS 드라마 <임꺽정> 중 한 장면(1997년 방영) ⓒ SBS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황해의 서흥·우봉·토산 등지나 강원·경기도 일대에서는 광한대당(壙悍大黨)이라 불리는 도적의 무리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 도적은 대개 토지로부터 이탈된 농민과 도망한 노비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각지로 번져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국가에서도 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한국민중사연구회편, <한국민중사 1>)

뒷날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임꺽정의 형세>이다.

기미년(명종 14:1559) 광적(獷賊) 임꺽정이 해서지방에서 발호하였다. 처음에는 명화적(明火賊)으로 살인하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대낮에 길을 막고 사람을 죽이며 관아의 옥문을 부수고 형리들을 난도질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관서에 이른 일로(一路)의 이민(吏民)들이 은밀히 결탁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여로 몰래 서울에 잠입하여 숨어 있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조정의 동정을 엿보면서 정보를 수집하여 상호 연락을 취하였다. 선전관이 어명을 받들고 그들의 자취를 따라가다가 구월산 아래에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장연·풍천 등 4,5읍 관병을 동원하여 장수에게 명해 가서 체포하게 하였다.

그들이 서흥에다 진을 쳤는데, 앞에 적들이 습격하여 관병이 흩어져 달아나서 적들은 더욱 기세를 부려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수백 리 사이의 도로가 거의 끝이었다.

공(남치근)이 경기·황해·평안 3도의 토포사를 겸임하여 재령에 나아가 진을 쳤다. 먼저 도적의 모사(謀士)를 잡아 그들의 허실을 모두 파악한 뒤 군마를 성대하게 모집하여 도적의 소굴을 포위하고 호령을 엄중하게 하니 한 명의 도적도 도망갈 수 없었다. 곤궁하고 다급하게 된 무리들은 와서 항복하는 자를 잡는 대로 처형하였고, 마침내 도적의 괴수를 죽였다.

돌아와서 노비 1000명과 전토 50결을 상으로 받았다. 당시 도적들이 발호한 3년 동안 한 도가 탕패되어 조정에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세력이 점점 널리 퍼져 거의 장각(張角:후한 영제 때 민중봉기를 일으켰던 황건적)의 형세와 같이 되었다.

당시의 의론하는 사람들이 "공의 위엄과 지략이 아니었던들 도적의 괴수를 체포하는 일은 끝내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남판윤 유사:구만중 작, 남판윤 묘지)

임꺽정이 처형되고 30년이 지난 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꺽정이는 참말 인물입니다. 꺽정이는 선성 듣던 것 보다 사람이 더 났습니다. 그 사람이 미천으루 말하면 백정의 자식이건만 딱 대면하구 보니 백정의 자식으로 하대할 수가 없습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중 형제 3에서.)
 

#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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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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