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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다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다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책, 고 권정생 작가의 <강아지똥>이었다. 불편한 이유는 이야기가 담은 메시지 때문이었다. 길에 떨어진 강아지똥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곰곰 생각하다, 자신이 쓸모가 없다며 슬퍼한다. 그러다 자신에게서 민들레가 싹을 틔운 뒤에야, 자신도 쓸모가 있는 존재였다는 걸 깨닫는다. 

이야기는 퍽 감동적이었다. 어떤 존재라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는 메시지가 결국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쓸모 있는 존재가 꼭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쓸모를 꼭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아이들이 혹시 쓸모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구분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쓸모'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요양원에 있는 분들이나 중증장애인들, 혹은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범죄자들. 노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대다수의 중증장애인들은 돌봄 노동자의 도움을 받으며 삶을 영위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제를 옹호하며 범죄자들에게 쓰는 세금이 아깝다고 말한다. 
 
작고 여린 아이의 손 쓸모의 잣대로 아이를 평가하고 싶지 않다.
작고 여린 아이의 손쓸모의 잣대로 아이를 평가하고 싶지 않다. ⓒ unsplash
 
오랜 시간 이들의 쓸모에 대해 골몰했다. 이 사람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쓸모 있는 사람이었더라도 현재 그렇지 않다면 내쳐져야 하는 걸까. 처음부터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쓰임이 있기는커녕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세금을 써야 할까. 답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질문은 의문의 깊이만큼이나 끝없이 이어졌다. 쓸모 있는 사람들의 삶만 가치가 있다면, 쓸모의 유무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해낼 수 있는 일의 정도라면, 그 일은 어떤 일이어야 하고 일의 양은 얼마만큼이어야 할까. 기준이 혹시 시점은 아닐까.

갓난아기를 두고 쓸모를 운운하지는 않으니, 어쩌면 쓸모는 미래의 가능성이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미래는 언제일까. 1년 뒤일까, 10년 뒤일까.

미래에 가치 있는 혹은 없는 인간이 된다는 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과거에 기여한 바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갑자기 쓸모라는 단어에 꽂힌 나는, 마음속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생각하면 할수록 쓸모의 의미는 흐려졌다. 

쓸모의 쓸모를 생각한다. '쓸 만한 가치' 혹은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을 뜻하는 말, 쓸모. 아무래도 단어의 정의가 온전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에 대한 쓸 만한 가치인지, 어디에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인지, 수식어가 빠진 느낌이다. 괄호를 그려 넣고 이렇게 채우고 싶다. '사람이 아닌 사물', '사물에만 쓰이는 단어', '생명에게는 절대 쓸 수 없음'.

빠져 있는 수식어 때문에 우리는 정작 적용해야 하는 데에는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대상에게만 쓸모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닐까. 쓸모를 실제 적용해야 하는 건 생명이 아니라 사물이 아닐까.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지, 지닐 가치가 있는 것인지, 한 번쯤 물어보고 소비한다면 자원의 낭비는 훨씬 덜할 것이다. 버려지는 물건의 양도 현저히 줄어들지 모른다. 마땅히 물어야 할 물건의 쓰임은 점점 묻지 않고, 물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쓰임은 더 많이 묻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인간은 동종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이 잣대를 들이댄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수소는 태어나면 바로 죽임을 당한다. 전 세계에서 도살되는 수평아리의 수는 매년 약 70억 마리. 이들은 암소보다 맛이 없어서, 우유를 생산하지 않아서, 알을 낳지 못해서, 첫 숨을 내쉬자마자 죽음으로 내몰린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동물인 걸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없지 싶다가도 먹고사는 문제가 모든 걸 집어삼킬 때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얼마 전 유은실 작가의 <송아지똥>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강아지똥>이 아니라 <송아지똥>이라니. 아류의 냄새가 풍기는 이 책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송아지똥인 똥또로동은 전설의 강아지똥처럼 자신도 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시멘트 마당에 놓인 똥에게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똥에게 친구들은 말한다. "넌 괜찮게 살았어." "네 똥생은 근사했어." 

이 그림책을 읽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내 마음이 한동안 불편했던 건, 아이들에게 꼭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훗날 아이들이 오래 방황하거나 보잘것없는 삶을 살지라도, 나만은 엄마인 나만큼은 끝까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었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소중했음을 이야기하는 책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어딘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퍽 안도감을 느꼈다.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니(지금까지는 지구 밖에서 생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주 전체를 통해 보면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충만한 우주에 홀연히 출현한 생명이라는 특별한 상태. (중략) 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생명은 더없이 경이롭고 삶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기적 같은 찰나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낭비하거나 남을 미워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김상욱 지음, 바다출판사

과학을 좋아하는 나는, 살아있는 모든 건 아름답다는 걸 과학을 통해 배운다. 아직 생명이 무엇인지 학자들이 합의한 정의는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흐리게나마 알고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경이롭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경이롭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 unsplash
 
생명은 결국 죽는다. 아직까지 지구 아닌 다른 행성에서 생명이 발견된 적은 없다. 존재만으로도 놀라운 생명은 비록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생명을 가진 이들이 서로 존중해야 하는 건 필연이 아닐까. 

조건 없이 사랑하고 싶다. 재고 따져가며 피곤하게 사랑하고 싶진 않다. 대상에 따라 사랑의 여부나 존중의 정도를 정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웃는다. 고양이가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월동을 준비하는 잔디가 점점 노랗게 변해간다. 나비 한 쌍이 그 위에서 평화롭게 날갯짓을 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경이롭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제 능력을 발휘하든 하지 않든, 영원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한다.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쓸모#육아#사랑#육아삼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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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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