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아내와 해외에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코로나가 심했던 최근 3년간 국내 여행조차 떠나기 어려웠다. 거리두기도 해제되고, 해외여행에 관한 규제도 없기에 적시였다. 첫째도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여러 후보군 중 태국으로 정했다. 아내는 떠나기 전 책까지 구매해서 열심히 여행 계획을 짰다. 요리 수업, 왕궁 체험, 디너 크루즈, 야시장 등 이야기만 들어도 설렜다. 그중에서 배 안에서 야경을 보며 식사하는 디너 크루즈는 꼭 가고 싶었다. 아내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여행 대행사를 통해서 모든 예약을 완료했다.
8월 초 드디어 태국으로 떠났다. 도착한 뒤엔 찌는 듯한 더위와 우기로 인한 급작스러운 비로 당황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이국적 풍경은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첫날은 온 가족이 다 같이 요리 수업에 참여하여 태국 요리를 직접 만들고 맛보며 즐겁게 보냈다.
이틀 차에는 태국 왕궁 체험을 다녀왔다. 마치 사진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놓았지만 모든 걸 태울 듯이 더운 날씨에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사진 찍으며 금세 녹초가 되었다. '원수가 있으면 반드시 왕궁 체험을 권유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삼 일 차엔 외출을 자제하고 호텔 숙소에서 수영도 하고 늦잠도 자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엔 그토록 기다렸던 디너 크루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자유를 누리다가 저녁 때 다시 모였다. 숙소에서 배를 타는 곳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걸어서 갔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아직 탑승까지는 30여 분 남았다.
표를 받는 곳에는 현지인 직원이 세 명 있었다. 아내는 앱을 켜고 예약 확인 내용을 보여주었다. 직원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수기 장부를 대조하더니 성인 두 명만 예약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마음에 나도 아내도 즉시 장부를 확인했다. 분명 거기에는 아내 이름으로 된 성인 2명만 예약되어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디너 크루즈가 가장 큰 실망을 안겼다
그러던 중 정말 탑승 시각이 가까워졌다. 현지인 직원은 확인을 위해 여행 대행사에서 보낸 바우처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아내는 급히 핸드폰 메일함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인터넷도 느리고 찾기 쉽지 않았다. 앱을 통해 네 명분이 결제 완료된 내용을 보여주어도 안 된다고 했다. 무조건 네 명이 기록된 바우처가 있어야만 탑승할 수 있다고 했다. 넷이서 탈지 말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 두 명분을 추가로 결제했다. 야외 테이블에서 넷이 함께 식사하려고 했는데, 결국 나와 아들 그리고 아내와 딸로 나눠지게 되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간이 영수증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크루즈 안은 많은 인파로 북적여 정신이 없었고, 밖에는 비까지 내렸다. 이미 타기 전부터 진이 다 빠진 터인 데다 내부 분위기마저 그러니 얼른 숙소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날 망친 하루 일정은 다음날까지 영향을 미쳤고, 우리는 찜찜함을 간직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며칠 시간이 흐른 후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여행 대행사 연락처를 받아 직접 문의했다.
사과 한마디조차 없는 적반하장 업체
상담 전화 연결은 쉽지 않았고, 거의 7~8여 분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연결되었다. 나는 여행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담당 직원은 그럴 리 없다며 현지 매니저에게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곤 간이 영수증 등 관련 자료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며칠이 흐른 뒤 다시 연락이 왔다. 매니저에게 확인해보니 4인 바우처를 아내에게 보냈고, 현지에서도 분명 4명이 예약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아내 메일을 확인해보니 그곳엔 분명 4인이 아닌 2인만 적혀있는 바우처만 있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전하고 또다시 메일로 관련 자료를 보냈다.
다음날 다시 해당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4인 것으로 보냈는데(아내 메일엔 온 내용이 없었음) 마지막에 2인 바우처를 잘못 보낸 것을 확인했다며 애당초 현장에서 우리가 2인 바우처를 보여주었으면 현지에서 잘못된 걸 바로 잡을 수 있었다며 우리 탓으로 돌렸다. 더구나 앱 홈페이지에 조치 받을 수 있는 연락처도 있었다는데 왜 연락을 안 했냐고 했다. 그 순간 화가 났다. 분명 잘못했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고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되물었다.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 유람선 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인터넷도 잘 안 되는 곳에서 그걸 찾아서 연락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업체 잘못도 있고, 우리 잘못도 있으니 추가로 결제한 한 사람분만 환불해 주겠단다. 황당했다. 오히려 추가로 낸 비용을 포함해서 전액 환불받아도 모자랄 듯했다. 이럴 때 환불 규정이 있냐고 재차 물으니 없다고 했다. 기준도 없이 임의로 판단한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중재도, 권고도 아무런 효력이 없는 현실
결국 수긍할 수 없다고 하니 그렇다면 소비자원을 통해서 정식으로 중재받는 방법밖에 없단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연락을 끊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한국소비자원 홈페이지 '피해자 구제'에 들어가 사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관련 자료도 제출하였다. 얼마 뒤 담당자가 배당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그 뒤로도 시간이 많이 흘러 사이트에 확인해보니 아직 사건 조사 중이고 완료되어야 합의 권고로 넘어갈 수 있었다.
'권고'란 단어가 크게 다가왔다.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을 하도록 권함'이니 반드시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결국 해당 업체에서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차올랐다. 솔직히 보상이 전부가 아니었다.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고생했을 상황을 본인들이 직접 겪었어도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업체와 연락했을 당시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마다 피해는 고스란히 고객 몫이고, 업체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마도 대다수가 그냥 넘어갔으리라. 소비자 구제까지 할 동안에도 절차가 쉽지 않아서 나 역시 그냥 포기해야 하나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구독자가 만 명이나 넘는 대형 업체도 이러니 다른 곳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소비자원 담당자에게 유선 연락이 왔다. 소비자원 측에서는 전액 환불을 권고하였으나 해당 업체에서 분명 본인들 잘못은 있지만, 그럼에도 4인 바우처를 출력해서 가지 않은 점(이메일로 받지도 못함), 현지에서 업체에 연락해서 조치를 받지 않는 점 등 우리에게도 귀책이 있다며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고 원안대로 추가로 낸 2인 중 1인 것만 환불이 가능하단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분통한 마음에 소비자원 담당자와 한참을 통화했다. 담당자 역시도 안타깝지만 소비자원 자체가 직접 수사를 할 권한도 없고, 법적인 조치도 불가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곤 차후 절차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 업체의 제안을 받아들여 1인 것만 환불을 받는 것, 둘째, 중재 위원회에 다시 한번 조정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다만 후자 같은 경우는 위원회가 소집되고 8개월에서 12개월이 시간이 걸렸고, 혹여나 조정안이 전액 환불이 나오더라도 이 또한 법적인 효력은 없어서 업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방법이 없고 종국엔 민사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통화 말미에 담당자는 소액 같은 경우는 민사 소송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또다시 속에서 천불이 났다. 업체에서 잘못한 것이 분명하고, 소비자원의 권고도 있었지만 업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니. 나 같이 억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그간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내와 나는 중재 위원회에 다시 한번 신청하기로 했다. 물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유리한 결론이 나지 않을지라도 이대로 물러서지 말자고 했다. 최소한 업체 측에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리고 싶었다.
또다시 긴 싸움의 터널에 진입했다. 최소한의 사과조차 없이 책임만 돌리는 행태에 우리는 끝까지 맞서보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