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
뭇 독서인들과 패셔니스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법의 단어, '가을'.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을의 낭만에 거하게 취하는 자들이 있으니, 바로 야구팬들이다.
야구는 4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간 144경기라는 긴 일정 끝에 1위부터 10위까지 정규 시즌 순위를 확정한다. 1위부터 5위는 순위별로 다시 맞붙어 최종 1위를 결정하는 포스트시즌에 참가하는데, 이는 통상 가을에 진행되기 때문에 '가을 야구'라고 불린다.
대개 야구팬들은 '가을 야구를 갔는지 못 갔는지'로 1년 동안의 결실과 성장 여부를 판단하곤 한다.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팀의 경우에는 '우승'이 아닌 '가을 야구' 진출만으로도 축포를 터뜨리거나 서로 부둥켜안기도 할 정도다.
야구와 낭만... 환호하는 사람들이 다 아빠 같았다
우리 가족이 응원하는 엘지 트윈스는 전국에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인기구단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단 한번도 정규시즌 우승과 포스트시즌 우승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이 문장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감격스럽다.)
'가을 야구'를 한 적은 있지만, 다른 팀의 우승을 위한 병풍이길 몇 차례였다.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요...'라는 식의 자기 위안과 안타까움과 분노와 기대가 버무러진 상태로 소위 '희망 고문'을 29년째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엘지팬 경력이 제일 오래된 아빠는 1994년, 그러니까 지금 내 나이인 26세에 우승을 본 이후로 50대 중반, 55세가 된 지금까지 우승을 기다려왔다. 시합을 이긴 날이나 진 날이나 경기 내용을 복습하면서 '94년도에 신바람 3인방이 있었는데…'로 시작하던 그의 추억 회상은 짠하기도 했지만, 어린 LG팬이었던 나를 건실한 어른 팬으로 만든 자양분이 되었다.
작년엔 팀을 바꾸겠다며 역정을 내면서도 결국엔 엘지 경기로 채널을 고정하고야 마는 아빠의 몰입은 나에게로 이어져, 세대를 잇는 낭만이 되었다.
다행히 '올해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지난 5월에 쓴 기사를 보시라. 기사는 다음과 같다(관련 기사:
살면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것... 29년만의 우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https://omn.kr/241fv ).
엘지 트윈스는 정규시즌 1위로 코리안시리즈(KS)에 직행했다. 엘지 팬들의 오랜 염원은 티켓 매진 속도가 증명했다. 표를 구매하지 못한 팬들은 음식점, 영화관을 대관해 함께 모여서 응원하기도 했다. 두건을 쓰고 북을 치며 응원을 주도하는 아빠 또래의 아저씨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영상으로만 보는데도 우리 아빠 모습 같아서 괜시리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코리안시리즈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3차전, 우리는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응원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말 치열한 경기였는데, '아, 나 진짜 못보겠어. 내가 보면 질 거 같아.' 하며 아빠의 등 뒤에서 실눈을 뜨고 봤던 9회 초 2아웃 상황에서의 3점 홈런. 우리 집 거실 공간에는 핸드폰과 베개가 날아다녔고, 그 아래에서 포효하는 '고릴라 세 마리'와 그걸 지켜보는 엄마가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세 번째 우승
이번 엘지 우승은 사실 그 자체로 낭만이다. 일단 우승 상품부터 구본무 전 회장님이 직접 구매했다고 알려진 롤렉스 시계와 오키나와산 아와모리 소주. 29년 묵은 소주니 와인과 다름없겠다는 말부터 29년 사이에 증발해 버린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타 팬들 사이에서도 엘지 우승 상품은 유명하다. (와중에 MVP 상품이었던 롤렉스 시계는 선대 회장님의 유품과 다름없으니 가져가지 않겠다는 캡틴의 현숙함에 감동은 더 진해져간다.)
고대하던 엘지 트윈스의 우승이 확정되던 11월 13일 월요일. 티켓팅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표를 사지 못한 나는 경기장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퇴근 후에 일단 잠실로 향했다. 일단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냥 가고 싶었다. 2호선으로 갈아타면서 또 잠실에 가까워질수록 엘지 유광점퍼와 야구 모자를 갖춰 입은 팬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마음이 절로 흐뭇해지고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인 5시 반, 잠실역 5번출구 앞에서는 방한복과 응원복을 챙겨 입은 많은 팬들이 이미 주경기장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길거리 포차 옆에서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 두 분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KT 팬이신가?"
"예? 아, 아니요. 저 LG팬입니다, 하하."
"아니 근데 옷에 왜 빨간색이 없어-?"
"아, 오늘 경기장에 못 들어가서 그냥 편하게 입고 왔어요."
"어! 그래? 그럼 아쉬우니까 잠실 어묵이라도 하나 먹고 가!"
그렇게 어묵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신 아저씨는 어느새 합석한 다른 분과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가셨다. 어묵 국물 때문일까, 유쾌한 아저씨 때문일까. 호호 입김 나오는 추운 날씨인데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날 5차전 경기는 지난 경기들보다 수월한 느낌이었다. 경기를 같이 보던 친구는 4회 즈음에 이미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고, 오늘이 '그 날'이 될 거라는 예감에 일찍 집으로 향했다. 스코어 6:2로 엘지 트윈스는 29년만에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잠실 사는 친구는 "어제 좀 일찍 자다가 불꽃 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이건 엘지 우승이거나 전쟁났거나 둘중 하나겠군' 싶었어"라며 간접 직관(?)의 후기를 들려주었다.
엘지의 우승에 눈물을 흘리는 팬들과 선수들의 모습이 TV화면에 비춰질 때마다 흘끔흘끔 아빠를 봤다. 아빠가 눈물을 흘렸으면 더 극적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아빠는 울지는 않았다. 그저 화면을 볼 뿐이었다.
"아빠, 축하해."
동생과 내가 건넨 말에 아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 반응했지만, 우린 마음 속으로 다같이 그 순간에 흠뻑 젖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함께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었다. 29년 간의 기다림을 함께한 익명의 엘지팬들에게도 이 말을 꼭 나누고 싶다. 정말 정말 축하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