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
아파트에 터줏대감 같은 고양이가 있다. 지난겨울 처음 모습을 나타냈지만 사람에게 낯을 가리지 않고, 다가가는 이들을 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많은 주민의 사랑을 받는 녀석이다.
아이들은 '호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귀여운 글씨로 명패도 만들어 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 사료를 챙겨 주시던 분이 개인 비용을 들여 TNR(trap-neuter-return(release), 길고양이를 포획해 생식능력을 제거하고 다시 방사하는 조치)을 위해 병원에 데려갔더니 놀랍게도 그 녀석은 이미 중성화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길고양이의 경우 중성화수술을 한 후 그 표식으로 귀를 1cm정도 잘라내지만 녀석의 귀는 전혀 그런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길에서 살기 전 분명 집에서 사람과 함께 살면서 중성화 수술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누군가 잃어버렸거나 아니기를 바라지만 버렸다는 얘기일 터.
최근 아파트 커뮤니티에 불만의 글 하나가 게시되었다. 바로 단지 안에 오가는 고양이가 무서워 고양이가 있는 곳을 피해 다니느라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이가 너무 무서워해서 이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사료를 주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는 얘기로 글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글엔 기다렸다는 듯 동조하는 의견을 댓글로 남겨놓은 분들도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분들을 향한 글이었으리라. 혹여 글을 게시한 분이 이사를 가게 된다면 그곳엔 과연 길에서 사는 고양이가 없을까. 의문이다.
나는 고양이를 잘 알지 못한다.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으나 강아지와 고양이는 습성이 다르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고양이가 먼저 다가와 사람을 위협하는 일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위협하는 건 오히려 강아지(개) 쪽이겠지.
고양이는 오히려 사람이 보이면 도망가는 쪽이 아닌가. 물론, 모든 사람이 고양이(혹은 강아지)를 좋아할 수는 없다. 고양이가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무섭거나 싫은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 불만 글이 게시된 이후 관리사무소에 고양이와 관련된 민원이 수차례 접수되었다고 한다. 해서 강제성은 없지만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자리를 철거해 달라는 협조문이 올라오기도 했고, 이후 누가 치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양이 사료 그릇이 치워지거나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집을 훼손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내가 사는 동 근처에서 큰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함께 다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녀석들이 자리 잡은 곳이 하필이면 분리수거장 옆이라 사람들 눈에 자주 띄게 되는데 사료 그릇이 사라진 이후 자꾸만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나 종량제 쓰레기통 근처를 배회한다. 그만큼 먹을 것이 궁하다는 얘기일 터.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은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갖고 있던 고양이 사료를 준 적이 있었다. 강아지 두 마리와 살고 있으나 마침 언젠가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모여 다니는 게 눈에 밟혀 샀다가 차마 주지 못하고 갖고 있던 게 있었다.
사료를 담은 그릇을 내려놓는 것을 본 큰 고양이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지켜보고 있었고, 새끼 고양이는 나를 보고 경계를 하면서도 다가와 그 사료를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았다. 경계하는 마음보다 허기짐이 더 컸던 거겠지. 그렇다고 집으로 데리고 와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섣불리 마음을 나누기가 조심스럽다.
이따금 그렇게 좋으면 데려가 키우라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마음이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 자신의 사육 능력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많은 수의 동물을 키우는 사람으로 동물 학대 중 하나)를 만드는 거다.
어디선가 보기를 길에서 사는 동물들, 특히 고양이들은 겨울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다는 얘기를 보았다. 많은 관심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길 위에 사는 동물들에게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 최소한의 인류애 정도가 아닐는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