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따끈한 쌍화차 한 잔? 찻물도 넉넉해요."
"어, 고마워요. 근데, 웬일이에요? 내 찻물을 다 챙겨주고. 사랑 받는 남편 다 됐네."
쌀쌀해진 주말 저녁, 애들은 밖에 나가고 집에 있던 우리 부부의 대화다. 겨우 찻물 가지고 뭘 사랑 받는 남편 운운하나 여길 수 있겠지만, 과거 우리 부부의 한참 멀었던 정서적 거리와 비교해 보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다.
아이들 일이나 집안일을 내 뜻대로 하려는 고집이 센 편인 나는, 은근히 가부장적 마인드로 시가 중심인 남편과 곧잘 부딪쳤다. 당연히 크고 작은 불화와 갈등이 많았고, 기억에 남는 일화 또한 차고 넘친다. 차를 타고 가다 싸워서 고속도로 갓길에 내려 걸어갈 뻔 하질 않나, 한밤중에 집을 나가 그것도 치안이 불안한 외국에서 분을 삭이느라 동네를 배회하기도 했다.
같이 살기가 도저히 힘들어서 남편 바짓가랑이 잡고 제발 헤어지자고 울구불구 매달린 적도 있다. 그러던 우린데,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싸우질 않는다. 갱년기 우울에 만사가 괴롭던 2년여 전만 해도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평화롭게 지내다니, 문득 놀랍고도 뜻밖이었다. 갱년기의 고비를 넘겨서 심적 여유가 생겨 그런가 싶다가 곰곰이 따져보니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주된 계기는 성장한 자녀들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
20대가 된 아이들이 부모를 꽤 머리 아프게 한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한 마디로, 사사건건 제멋대로 하겠다는 아이들 주장이 어찌나 강한지 그 기세에 눌려버린 거다. 밤낮을 거꾸로 사는 아이에게 건강에 안 좋다고 한소리 하면, 제발 좀 내버려 두라고 나보다 더 언성을 높인다. 거실에서 남편과 대화 중 목청이라도 커지면, 시끄러워 일에 집중을 못하겠다고 야단을 떤다.
아이들이 학업, 진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줄은 알겠지만, 경험에서 우러난 나의 조언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잔소리로 우습게 취급받을 때면 자괴감마저 들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녀석들의 심기를 살피고 언쟁하지 않으려 말을 삼갈 때가 많다. 내 나름대로 인성에 공들여 키웠다고 자부한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속상하고 억울해서 속으로 끙끙 앓는 때가 늘어가고, 다 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결국 자식들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을 유일한 대상은 그 아이들을 낳고 키운 부부밖에 없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에게 서운한 점들을 흉도 보고 하소연을 한다. 이런 상황이 도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다. 아직까지 아이들과 정서적 거리를 좁힐 뾰족한 대책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함께 고민을 나눌 남편의 존재만으로 어찌나 든든한지!
남편의 존재에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실로 오랜만이다. 헤어지지 않고 버텨 살아내 서로 의지할 수 있음이 진정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아이들이 밀어내는 만큼 남편과 가까워진 것 같다. 남편과 부쩍 소통이 활발해지고 서로 위안이 되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늘었다. 한동안 안 하던 영화를 같이 보고, 카페에 가고, 짧은 여행도 다시 다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는 공주 공산성엘 함께 올랐다.
산성이니 당연히 오르막 길이었는데, 초반에 경사가 꽤 가팔랐다. 어디까지 가파른지 전방을 눈으로 가늠하는데 오르막 길이 시야 밖으로까지 돌아 이어지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굳이 울타리도 없는 저 급경사길을 올라가야 하나 싶어 그냥 내려가자고 말하려는데 남편은 이미 저만치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뒤따르는데, 경사가 급하니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고 한참을 땅만 보고 걸었다.
힘들어서 금방 '아이고' 소리가 튀어나오고, 쓰지 않던 근육들이 당겨져 다리가 아파왔다. 뒤편에선 단체로 온 일행들이 서로 안 오르겠다며 상대방에게 너나 다녀오라고 말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래, 날도 추운데 안 오르는 게 현명하지.' 나도 속으로 그들 말에 동조하면서도 투덜투덜 남편 뒤를 쫓았다. 그렇게 한 10여분 쯤 올랐을까. 힘든 경사길이 어느새 끝나고 평평해진 길 옆에 경치가 시원한 '쌍수정'이란 정자가 나타났다.
조선 시대 인조가 즉위하고 1년 만에 '이괄의 난'으로 피신했다가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기댔던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곳에 세운 정자라고 한다. 유래 깊은 정자에서 멀리 흐르는 강을 시원하게 바라보니 마음이 탁 트였다.
조금 전까지 찬바람 속에 낑낑대며 올라온 기억은 금세 사라지고, 남편과 사진을 찍으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안 올라왔으면 이런 재미를 모르고 지났겠구나 싶었다.
문득, 산성에 오른 짧은 과정이 불화의 시기를 어렵게 보내고 다시 사이좋게 된 우리 부부의 상황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힘든 경사길만 보고 산성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 멋진 '쌍수정'의 풍광을 감상하지 못했으리라. 그처럼 우리 부부도 삶의 굴곡에 굴복해 결별했다면 이런 화목한 시간을 보내진 못 했을 테고.
힘듦을 견딘 뒤에 찾아오는 보상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삶의 묘미가 반갑다. 살면서 서로에게 얕고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아물며 상처 자리마다 이해와 연민의 새살이 돋아 또 살아갈 힘이 나는 게 50대 부부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 아이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당장은 소소한 갈등에 서로 편치 않지만 무던하게 이 시기를 넘긴다면 알콩달콩 지낼 날이 또 오겠지. 다시 기다려 볼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