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이 또 '넥슨 짓'을 했다." - 정화인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사무장
게임업계가 또다시 페미니즘 사상검증 논란에 휩싸였다.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넥슨 사옥 문 앞엔 '2023년 노동법 사망을 애도한다', '개인사상 검열·부당해고 규탄한다'고 적힌 근조화환 9개가 놓였다. 일반 시민과 여성·노동단체들은 "기업들이 혐오세력 앞에 그야말로 납작 엎드렸다"고 비판했다.
넥슨에서 8년 만에 재발한 사상검증 논란
대형 게임사인 넥슨은 지난 23일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여성 캐릭터인 엔젤릭버스터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게임 홍보 애니메이션을 공개했다. 그런데 일부 남성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게임 홍보영상 속 캐릭터 손 모양을 두고 남성혐오(남혐)를 상징하는 '집게 손'이라고 주장했다.
남성 이용자들 집단 항의가 이어지자 넥슨은 26일 자정께 공식 유튜브 채널에 사과문을 올리고 영상을 비공개 조치했다. 제작사인 스튜디오 뿌리도 입장문을 통해 "게임의 방향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런 발언들로 해당 영상이 연관되게 한 점 정말 죄송하다"며 "해당 스태프는 앞으로의 수정 작업 등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작업하고 있던 것도 회수해 폐기하고 재작업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 이용자들은 집게 손 모양이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상징이라며 페미니즘 사상검증의 증거로 활용하고 있다. 집게 손 모양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21년 편의점 GS25와 치킨업체 BBQ 등은 홍보물에 집게 손 모양을 사용한 뒤 해당 홍보물을 내리고 사과한 바 있다.
특히 '사상검증'에 따른 여성 노동자 부당해고는 게임업계에 만연한 고질병이다. 넥슨 코리아는 지난 2016년에도 한 성우가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어 논란이 일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2018년 IMC게임즈는 자사 일러스트레이터가 SNS에서 페미니스트를 팔로우하자 일러스트레이터의 실명을 공개하고, 징계성 면담기록을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했다.
2023년 7월에는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개발사인 '프로젝트문'이 모바일 게임 개발에 참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입사 전 SNS에서 불법촬영 반대시위 등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했다.
"0.1초 손가락 움직임이 남혐 증거? 한국 대표기업이 음모론에 동조"
한국여성민우회와 양대 노총 등 여성·노동·인권 단체들은 28일 오전 11시 넥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0.1초 만에 지나간 자연스러운 손의 움직임을 (남혐의) 증거라고 우기는 주장이 통한다면 누가 이 혐오 몰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라며 "이러한 몰이는 모든 여성을 위협하며 이들에 대한 실제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지난 4일 경남 진주에서는 한 남성이 (피해여성의) 숏컷을 이유로 '페미'라고 주장하며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폭행하지 않았나"라며 "기업이 일부 여성혐오적 소비자의 '기분나쁨'에 따른 억지 주장을 받아주고 감정을 달래며 사과하는 것은 구조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에게 폭력성을 돌리는 행위로 여성의 안전을 팔아 이익을 챙기려는 비굴한 행태"라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반사회적 여성 공격 '놀이'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주체인 기업이 이들을 소비자로 승인하고 힘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라며 "특히 넥슨은 2016년 페미니스트 퇴출을 요구하는 일부 소비자의 요구를 수용한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장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만든 원흉으로, 8년이 지난 지금도 무책임하고 악의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이크를 잡은 정화인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사무장도 "넥슨이 또 '넥슨 짓'을 했다"며 "한국 게임을 대표한다는 기업이 정신 나간 음모론에 동조하니 전세계적으로 비웃음 받을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여성 창작자에게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매년 일어나는 일이지만 정부나 기업 누구도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며 "이런 상황에서 여성 창작자들은 '혹시 손가락 모양이 문제되지 않을지' 생산성 없는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미디어와 젠더' 등을 전공한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역시 입장문을 통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글로벌 게임 회사를 중심으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선언을 하며 게임 내 다양성 가치를 재현하고 있다"며 "그런데 한국 게임업계가 보여주는 양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지 참담한 심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의 경우 하청업체에 대한 꼬리자르기식 압력 행사이자 여성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임에도 넥슨은 어떠한 공적 논의 과정도 없이 페미몰이에 부응하고 있다"며 "앞으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게임에선 손가락을 사용하는 장면을 그리면 안 될 지경이다. 이러한 억지민원에 응하기보다 노동자를 보호하고 게임의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넥슨 본사 서문 앞에서 주먹을 쥐고 "억지논란 허위날조 조작말고 중단하라", "성차별 여성배제 넥슨은 반성하라", "노동자 위협하는 무책임한 운영 규탄한다"고 구호를 외쳤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경찰 수십 명도 출동했다. 기자회견이 예고되자 이날 새벽 1시30분쯤 온라인상에 '내일 넥슨 (본사 앞에) 페미니스트들이 모이면 칼부림을 하겠다'는 협박글이 게시됐기 때문이다.
"'살가죽 벗겨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연대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재차 불거진 사상검증 부당해고에 일반 시민들 또한 게임사를 적극 규탄하며 불매운동 등 연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넥슨의 집게 손 사상검증을 규탄하는 연대서명에 2만 5511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SNS 상에서는 반페미니즘을 규탄하는 '해시태그 총공(총공격)' 긴급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성 이용자들은 27일 오후부터 SNS를 중심으로 '#페미니즘_사상검증은_여성혐오', '#여성목숨_위협하는_반페미니즘'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글을 올리는 등 연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해시태그들은 시작한 지 2시간여 만에 엑스(X, 옛 트위터)에서 3천 회가 넘게 공유됐다.
이들은 해시태그와 함께 '범죄선동 혐오선동 반페미니즘 규탄 시위 긴급총공'이라고 적힌 붉은 배경의 포스터를 SNS에 공유하며 "억지로 만들어 낸 논란거리", "게임업계 사상검증에 반대한다", "모든 여성혐오를 규탄한다" 등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글을 게재했다. 28일 오후 12시 기준 '엑스(옛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검색어에는 '게임업계', '남성혐오', '손가락 모양'뿐만 아니라 '페미니즘(4만여 회 공유)', '페미니스트(2만여 회 공유)' 역시 주요 키워드로 올라와 있다.
이번 해시태그를 기획한 여성주의 팀 '화로(구 여혐방역대)' 관계자는 28일 <오마이뉴스>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 넥슨 사태는 사회 기저에 깔린 여성혐오 때문에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여성을 겨냥한 폭력이 종식될 때까지 무기한으로 총공을 진행하며 온라인에 갇히지 않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대변되도록 여러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로 관계자는 "여성혐오 피해자에 대한 해고를 종용하는 것은 '그저 가만히 당하다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다"며 "국가에서 '반페미니즘 정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야기해 목숨을 위협하는 테러리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그간 '싹 다 잡아다가 (살)가죽을 벗기면 속이 시원하겠다', '한데 모아 불로 태워야 한다' 등 각종 협박글에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이기에, 반페미니즘을 방치할 수 없어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너무나 만연해) 기사조차 나지 않는 각종 여성혐오에 맞서 끝까지 연대하는 이들과 함께 싸우겠다.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 화로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