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첫째주, 방방곡곡 진솔한 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체험 함양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주간함양> 곽영군 기자가 함양의 치열한 노동 현장 속으로 들어가 체험하면서 직업에 대한 정보와 함께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흥미롭게 전하는 연재 코너이다. 관련 영상은 유튜브 '함양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기자 말
구수히 떡을 찌는 냄새가 경남 함양을 자욱하게 메운다. 겨울의 상쾌함이 새벽과 어우러지며 묘한 감성을 자극하는 시간. 새벽녘 읍내를 먼저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추워진 날씨는 이미 겨울을 가리키고 있지만 수증기로 가득한 떡방앗간은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이번 '체험 함양 삶의 현장'에서는 이른 시간 함양을 가정 먼저 여는 '남양 떡방앗간' 임동현·전상순 모자를 만나 그들과 함께 떡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했다.
떡은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아서 만드는 음식으로 인절미, 송편, 가래떡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특히나 날씨가 쌀쌀한 이맘때면 떡국 한 그릇이 떠오른다.
이번 체험을 위해 함양읍에 위치한 남양떡방앗간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가게 내부가 분주하다. 가게를 방문한 시간은 오전 7시, 인사와 함께 첫 임무가 곧바로 배정된다. "무슨 일을 할까요?"라는 질문에 임동현씨는 "무슨 일을 배우든 처음에는 설거지부터 시작이다"라며 농담 삼아 말했다. 대대로 유명한 가게에서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서는 설거지부터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不文律). 고무장갑을 손에 끼웠다.
준비된 두건과 손목 토시,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따로 설명은 없었다. 수세미를 가지고 떡을 찌고 남은 용기를 닦았다.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초보자 특유의 부산함을 보였다. 임씨는 "그래도 깔끔하게 용기를 잘 씻었다"라는 칭찬을 늘어놓으며 다음 일을 추천했다. 소위 말하는 '츤데레'(일본속어 무뚝뚝하게 챙겨주는 사람을 대상으로 지칭하는 말) 같았다.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떡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 분쇄기에 쌀을 집어넣는 일이다. 저울에 10.5kg 무게를 맞추고 분쇄기에 쌀을 넣었다. 기계는 맷돌이 맞물리며 가루를 내는 방식으로 막대기를 이용해 조금씩 쌀을 맷돌 입구로 밀어 넣었다. 이때 임씨는 "절대 손을 맷돌 근처에 넣으면 안 된다. 기계는 몇 개가 망가져도 괜찮다.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앞에도 말했듯이 사람은 따뜻하다.
맷돌에 갈린 쌀은 흰 눈과 비슷했다. 가루가 된 쌀에 소금과 물을 적당량 넣고 섞는다. 임동현씨는 정확한 정량을 맞춰 물과 소금을 넣지만 베테랑인 어머니 전상순씨는 감각으로 넣는다. 임씨는 "어머니가 감각으로 넣는 소금과 물의 양이 저울을 이용해 무게를 재는 것과 비슷해 놀란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 전상순씨가 진짜 장인이다.
잠깐의 휴식시간, 전상숙씨가 떡 한 조각을 권했다. "잠깐 이쪽으로 와서 떡 하나 먹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떡 하나를 입에 넣었다. 사실 저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갓 만든 떡은 과장 없이 꿀맛이다. 전래동화 '해님달님'에서 육식 동물인 호랑이가 왜 떡을 요구했는지 지금에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다음으로 완두콩 백설기를 만들기 위해 사각형 용기에 완두콩을 촘촘하게 뿌리고 곱게 갈린 흰 쌀가루를 그 위에 부었다. 그러고는 전체 면적이 평평해지도록 용기를 돌려가며 펴냈다. 이어 평평해진 흰 가루 위로 백설기 모형 직각사각형 자국을 남겼다. 꼭 옛날 수제 빨랫비누 크기다. 임씨는 자국을 따라 가로세로 칼집을 냈다. 그러고는 칼을 건네며 "최대한 칼날을 짧게 잡고 잘라야 편하다. 시선은 칼을 보지 말고 선에 두어야 된다"고 조언했다.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흰 가루를 가르고 있으니 옆에서 나머지 가루를 임씨가 수십 초 만에 끝냈다. 전문가는 달랐다.
가래떡 끊기, 보기보다 쉽지 않네
이렇게 칼집을 낸 가루를 떡으로 만들기 위해 찜통에 올려놓고, 남은 시간 가래떡을 뽑았다. 방법은 기계에 떡을 밀어 넣고 물속에서 뽑으면 되는 것. 처음 뽑은 떡은 다시 기계에 넣고 다시 뽑는다. 임씨가 먼저 방법을 선보였다. 적당한 크기로 떡이 나오면 손을 이용해 떡을 끊었다.
간단한 동작이기에 바로 따라했다. 이상하게 떡이 끊어지지 않는다. 분명 임씨가 떡을 끊을 때는 쉽게 떨어진 떡이 치즈 늘어나듯 늘어난다. 이에 임동현씨는 "끝부분을 손으로 빠르게 낚아채면 된다"라고 말했지만 쉽지 않다. 이 와중에 옆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께서 "기술자와 같을 수 있나"라며 한 마디 던졌다. 맞는 말이지만 섭섭하다.
마지막은 말린 가래떡을 떡국에 넣을 크기로 자르는 일이다. 말린 가래떡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견고했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떡방앗간이 현대화를 이루어 많은 부분 기계가 대신하고 있지만 과거 손수 떡을 썰었던 시기에는 굉장히 벅찼을 일이다. 한석봉 선생이 어머니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후 다시 절로 군말 없이 돌아간 이유가 있다.
임동현씨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2년간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해 상경하여 세 번의 직장을 옮긴 후 고향으로 귀향했다. 전상순씨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아들과 같이 일하니 든든하고 좋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때로는 모자지간,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는 그들은 오늘도 티격태격 즐겁게 남양떡방앗간에서 활기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