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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에서 7022번 마을버스에 올랐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김환기의 그림을 보고 싶었다. 글과 사진으로 접했던 그림을 직접 보고 뭔가 얻어가고 싶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며 마주하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일부인 듯 일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지난달 말 이야기다.

환기 미술관이 자리잡은 부암동은 서울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이 남편의 작품을 만나러 온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이 곳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환기 미술관은 점, 선으로 이뤄진 그의 대표작들뿐 아니라, 그 작품들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김환기의 실험적인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긴 글들과 서적, 사진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들을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은 배경이 되어 우리를 그림 속으로 이끈다. 

죽기 전 10년 동안의 작품, 그의 마지막 도전 
 
김환기 점점화 작업 사진 환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환기 작업 사진
김환기 점점화 작업 사진환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환기 작업 사진 ⓒ 이지완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는 김환기의 그림들은 나와 같이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번쯤은 접해봤을만큼 그 유명세가 대단하다. 국내 작가들 중 가장 고가의 경매로 값이 매겨지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김환기의 추상미술 작품들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월간미술>에서 실시한 앙케이트에서 작고한 작가중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김환기란 이름을 최고의 작가로 기억하게 만든 작품은 단연코 점과 선의 반복성으로 이뤄진 그림들이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모두 죽기 전 마지막 10년 동안의 작품이다.

저마다 여러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김환기의 대표작들은 그의 생애 마지막 도전의 결과물이었다. 김환기가 점과 선을 붙잡고 씨름했던 마지막 10년이 있기 전 이미 그는 화가로서 교수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1952년에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후, 미술학부장과 학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상 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commissioner: 행사에서 기획-운영-작가선정 등에 권한 지닌 최고 책임자) 자격으로 참석해서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한다. 그대로 돌아왔으면 교수로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 수 있었겠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부인 김향안과 함께  키가 큰 김환기가 두드러지는 부인 김향안과의 사진, 환기 미술관의 전시 로비에 있는 사진
부인 김향안과 함께 키가 큰 김환기가 두드러지는 부인 김향안과의 사진, 환기 미술관의 전시 로비에 있는 사진 ⓒ 이지완
 
상 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새로운 눈을 뜬 김환기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뉴욕으로 향했다. 고국에 환멸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글에는 고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자신의 작품으로 새로운 도전을 결단했고 타지에서 새로운 길을 시작했다. 록펠러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기 전까지 그가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은 없었다. 국내에서는 교수, 학장, 협회장, 이사장이었지만 뉴욕에서 그는 이제 아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은 단지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붙었던 자리의 이름들이 떨어지고 그는 그저 '김환기'가 되었다. 한국에선 제법 성공한 '누군가'로 살고 있던 그의 삶이 이제 타지에서 '아무나'로 살게 된 것이었다.

썸바디(Somebody)에서 노바디(Nobody)가 된 그에게 여백이 생긴 것일까. 그는 비로서 점과 선을 붙들고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 반복되고 고된 작업의 과정 속에 드디어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창조한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 <그림에 부치는 詩>, 7p)

15년 정든 직장을 떠나면서

나는 이번 달을 끝으로, 15년 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떠밀려 나온 것도 아니었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올해 초부터 생각해왔고 아내와 여러 사람들과 얘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마음이 시원 섭섭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불안하고 두려웠다. 결정을 내린 후 몇일 밤을 계속 뒤쳑였다.

왜 이렇게 내 마음의 파도가 요동칠까? 이제 제법 익숙해지고 쉬워졌는데 떠나야 한다는, 그동안의 수고가 아까워서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처럼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의 부재에 의한 압박일까. 둘 다 어느정도 내 속에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프랑스 사람들 말에 '달 같은 바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태양처럼 찬란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항상 뜨거운 것을 잃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김환기, <그림에 부치는 詩>, 21p)

점점화를 보러 환기 미술관을 찾았지만, 그 작품보다 작품의 창작자 달처럼 살아갔던 김환기의 삶이 더 눈에 들어왔다. 태양처럼 찬란한 삶만을 추구했다면 우리는 점점화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달 같은 바보'란 단어처럼 김환기가 생전 달처럼 은은한 삶을 추구했기에, 사람들 눈에는 바보같아만 보이는 무식하고 단순한 점과 선만을 붙잡고 씨름하는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를 몰라주던 어둔 밤에도 뜨거운 마음을 잃지 않고 도전했던 김환기를 만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한 조직에서 이런저런 모양의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나는 '누군가'로 인정받길 원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칭찬, 물질적 보상, 진행했던 일에 대한 성과들, 앞으로 쌓일 커리어들을 통해 난 마치 성공한 '누군가'가 된 것만 같았고 그런 누군가가 되길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환기 여정을 보며 나는 또 알게 된다, 내가 '누군가'로만 머무를 때 정작 정말 새로운 '나의 길'은 찾을 수 없음을 말이다. 아마도 오는 2024년을 나는 '아무도'로 살아가겠지만, 이 어둔 밤을 견디며 나만의 새로운 길이 트이길 기대한다. 

#김환기#환기미술관#그림에부치는시#어디서무엇이되어다시만나랴#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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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지금까지 계측 관련된 일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세계에 있지만 사회의 정의와 약자를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로서 다음세대에게 건강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소망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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