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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편집자말]
좋아하는 영화 중에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듦)이 있다.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보는 이 영화는 남녀가 서로에게 갖게 된 오해(상대방이 오만하다는 편견)를 풀고 진정한 사랑을 알아가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도 물론 좋았지만, 유달리 많이 나온 산책 장면이 더 생각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남녀 주인공은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황량한 영국 들판을 산책하러 나간다. 마치 육체를 위해 끼니를 챙겨 먹듯, 산책은 영혼의 양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집을 나서서 걷곤 한다. 

특히 여자 주인공 키이라 나이틀리가 노을 진 겨울 들판을 걸으며 코 끝이 빨개진 채 맑게 빛나는 얼굴을 비춘 장면은, 찬 바람이 부는 요즘 같은 겨울 산책을 즐기는 프로 산책러들의 모습과 비슷할 듯하다.

'참 이상도 하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왜, 이 추운 겨울 코끝이 빨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으러 나가는 걸까? 무엇이 모자와 장갑, 목도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걸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산책의 묘미

그 결과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그 시간만큼은 명징하게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걸으러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걷기만 했는데도 생각이 정리되고, 고민이 해결되며,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눈빛마저 맑아진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산책의 묘미다.
 
송정옛길 최근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엄마와 함께 찾아간 송정옛길
송정옛길최근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엄마와 함께 찾아간 송정옛길 ⓒ 박정선
 
이러한 산책의 즐거움을 더욱 잘 느끼려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매일 다니는 동네도 골목 골목을 누비며 낯선 곳을 찾아 걸어보시라. '프로 산책러'가 되면 자주 걷는 익숙한 길보다 새롭게 알게 된 길을 걸을 때 훨씬 재밌다.

걷기 좋은 새로운 길에 대한 정보라도 듣게 되면 이번엔 또 어떤 즐거움이 기다릴까 생각하며 들뜬다. 처음 가 보는 곳이라면 전날부터 휴대전화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 놓고 거기까지 갈 방법을 생각하는데 그것조차 신이 난다.

'음, 그래. 그 길을 다 걸으려면 한 시간은 넘겠군. 그럼 6천~7천 보 정도 나오겠네. 만 보를 걸으려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보다 몇 정류장 전에 내려야겠다. 처음 가는 곳이니 미리 내려서 구경하며 가는 것도 재밌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최근 산책을 하면서 점점 더 명료하게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알고는 있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이 사실은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 송정옛길
ⓒ 박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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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 보니 자신을 믿고 스스로와 잘 화해한 날은 늘, 여유롭고 활력이 넘치며 긍정적이다. 반면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이고, 지금 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별일 아닌데도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곤 한다.

내가 나에게 화가 나 있거나 할 때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아하~!' 하는 외마디 단어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비로소 소란스럽던 생각은 흙탕물이 가라앉은 후의 윗물처럼 맑아진다.

마치 암흑 속을 걷다가 저 멀리 터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의 환한 빛이 보이는 것처럼,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나만 따라다니며 비춰 주는 것처럼 주변이 온통 밝아진다. 콧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흥얼거리며 걷게 된다.

찌뿌둥했던 생각이 가벼워지고 나면 '그동안 움츠러들게 했던 것들은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면 일은 가야할 방향으로 가게 될 거라'는 마음의 자유가 찾아온다.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상황을 해결해 줄 답이 떠오르기도 한다. 걷는 것만 계속 하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번개처럼 해결책이 떠올라 "이 생각이 왜 지금...?" 하며 스스로도 놀란다.  

시작하면 계속할 수밖에

이러다보니 단순히 땀 흘리며 운동하기 위해 길을 걷는 것을 넘어서서 산책을 기다리게 된다. 걷기만 했을 뿐인데 새로운 나를 만나고, 불현듯 떠오르는 (애써 생각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걷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올라 신기하기만 한) 아이디어도 얻게 되니 자꾸자꾸 걸으러 나가게 된다.

앞에서 말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추운 겨울 코 끝이 빨개지도록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걷는다. 학설에 따르면 20분만 걸어도 부정적인 생각이 가라앉고, 40분이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며, 1시간을 넘기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는단다. 산책은 시작하면 계속할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 

2024년 새해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기 마련인데 '프로 산책러'가 되는 것도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직접 해 보면 그냥 알고만 있던 것과는 달리 놀랄 일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2024년 새해에는 '프로 산책러' 회원이 되어 산책하세요! 물론 회원들 간의 모임은 없습니다. 산책은 자기 자신과 만나는 가장 고요한 시간이니까요. 하하하."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2024년에는#나도프로산책러#새로운길#산책의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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