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농민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살다 간 곳은, 아무래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풍수지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발발과 전개 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나고 자란 곳을 살펴볼 이유는 충분하다.
먼저 전봉준 생가다. 고창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13세 이후 정읍 감곡면 계봉리(現 계룡리 관봉마을)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산외면 동곡리로 이주해 청년기를 보낸다. 30대에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로 이주, 그곳에서 동학혁명을 주도한다. 동학사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 등이 경성에 압송' 부분에서 거주지를 언급한다.
그는 자라서 고부 양교리(陽橋里)와 전주 구미리(龜尾里)며 태인 동구천(洞口川) 등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다. …(중략)… 선생은 일찍 시서백가어(詩書百家語)를 안 본 것 없이 두루 섭렵했으나 마음으론 항상 만족지 못하였고, 처지가 딱하여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해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무자년(1888년)에 손화중(孫和中) 선생을 만나 도(道)에 참여하여 세상을 한번 바꿔보고자 결심, 서울 정치계의 흐름과 변화를 늘 염두에 두었고 특히 외세(外勢)를 살펴본 바가 있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1∼272 의역하여 인용)
전봉준이 동학에 입문한 시기 등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90년을 전후한 시기 서장옥이나 황하일, 손화중의 영향으로 입문했다는 게 통설이다. 죽기보다 살기가 더 힘들었던 당시, '사람이 곧 하늘'이란 한 마디 말로 민중들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던 동학의 힘을 실감한다.
여러 곳의 생가터
네 갈래로 갈라지는 이평면 사무소 앞이 말목장터다. 장내리 조소마을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600여m를 가다 서쪽으로 꺾어 돌아야 한다. 생가 가는 길에 두승산과 천태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든다.
두승산에서 발원해 북으로 흘러 동진강에 몸을 푸는 덕천천 건너, 조그만 언덕 너머가 생가다. 둔덕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 중앙에 오래된 우물이 있고, 바로 옆에 초가를 이고 있다.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곳 중 특히 주목되는 곳이 원평이 지척인 감곡면 계봉리다. 원평은 언양 김씨가 세족을 이룬 곳으로, 전봉준 어머니가 언양 김씨다. 후에 동학혁명의 든든한 동지가 되는 외가 친척 김덕명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 살던 때 둘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이는 훗날 교조 최제우 신원 운동 과정에서 미온적인 보은집회가 열릴 때, 이에 대항하여 교단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강경한 원평 집회를 개최하게 되는 힘으로 작용한다. 혁명의 주요 인물의 하나인 최경선 근거지 또한 인근이다.
동곡리 지금실은 다름 아닌 동학의 또 다른 축이 되는 김개남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막역한 사이가 된다. 김개남의 중매로 전봉준 딸이 혼인하여 동곡리에 살았을 정도로 가까웠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갈등을 부각하는 연구가 있기도 하나, 이는 여러 요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읽힌다. 일례로 혁명 전술과 전략에 대한 차이, 혁명군 간 역할 분담, 청년 시절 둘의 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보인다.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아버지 전창혁은 잔반(殘班) 혹은 향반(鄕班)으로 몰락 양반이다.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했고, 어디에 살았건 서당 운영이 생계 수단이었던 듯하다. 서당 수입도 변변치 못해 약간의 농사와 보조 수단으로 약방을 겸해 운영하며 살았다.
고부 살던 때 전창혁이 향교 장의(掌議)였다는 설(說)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학문이 꽤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봉준 교육에 있어, 전창혁이 직접 가르치거나 어려운 사정에도 꾸준히 서당에 보내 공부시킨 열의도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전창혁은 매우 의식 높은 향촌 지식인으로, 전봉준의 의식과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란 짐작은 그래서 매우 타당해 보인다.
전창혁의 이러한 저항 지식인으로서 면모는 실천을 통해 전봉준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죽음이다. 1893년 6월경 전창혁의 죽음에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공동으로 일치하는 부분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침탈에 항거하다 모진 매를 맞아 장독(杖毒)으로 죽었다는 점이다.
조병갑이 옛 보(洑)를 허물고 무리하게 만석보를 축조하면서 1년간 세금을 면제한다는 약속을 깨뜨리자,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등소(等訴) 하는데 장두(狀頭)가 다름 아닌 전창혁이다. 그전에 조병갑 어머니가 죽자 고부에서 2천 냥의 부의금을 걷자는 일에 심하게 반대하여 조병갑의 원한을 사기도 했다.
전창혁의 이러한 일련의 실천을 볼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정의감과 저항 의식은 자연스럽게 전봉준은 물론 수많은 농민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품성과 의식
전봉준의 생계 수단 역시 아버지와 비슷했는데, 조소리와 말목장터에서 서당과 약방을 운영하며 농토 3두락(600여 평)을 경작했다. 젊은 시절 산천을 유람하면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이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묫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지역에 경조(慶弔)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축하와 조의를 표했으며, 항시 신중한 언사와 행동으로 향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유교 덕목에 충실한 품행으로 명망과 덕망을 동시 얻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에서 이러한 폭넓은 신망과 존경은, 나이는 물론 계급과 관계없이 향촌에서 광범위한 인간관계 형성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을 잘 아는 노인을 취재한 내용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노인이 말하기를, 그는 작은 키지만 얼굴이 하얗고 눈빛은 형형해서 사람을 쏜다. 평소 집에서는 마을 소년에게 동몽(童蒙)을 읽히고 천자문을 배우게 했으며, 노인이 오면 옛 현인의 사적을 이야기하고 세상 이야기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없으면 하루 종일 묵묵해서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를 섬기는데 봉양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고 집이 빈곤해도 농사를 알지 못했다. 때때로 멀리서 손님이 찾아와서 며칠 체류하는 일도 있었다. 마을 사람과 잘 사귀지 않았고 마을에 경조사가 있으면 그는 먼저 절하고 축하했으며 참석해서 조의를 표했다. 마을 사람 모두 그 인물의 심상하지 않음을 알고 그를 깊이 존경했다. (이단의 민중 반란. 조경달. 역사비평사. 2008. P144에서 재인용)
하지만 전봉준이 구체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게 만든 가장 주요한 요인은, 생계유지도 어려운 경제 사정이라 할 만하다. 청소년기에는 계급이 결정해 놓은 운명이라 체념한 듯도 하나, 청년기엔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민중의 생활상을 몸으로 겪으며, 궁핍이 운명이 아닌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정에서 신분과 관계없이 체제 저항 의식을 품은 지식인과 지사를 폭넓게 사귀고, 각 지역의 지형과 인문 지리 여건을 충실하게 공부하였던 듯하다. 훗날 남접의 든든한 후원자와 동지가 되는 서장옥이나 황하일 같은 주요 지도자들도 이 과정에서 의기투합한 게 아닌가 추정한다. 동학사는 '전봉준 선생이 13세 때에 지은 백구시'에서 이를 암시하고 있다.
선생은 항시 세상 모순을 못마땅히 여겨 사람을 사귀어도 신사상을 가지고 개혁의식이 강한 사람과 같이하고자 애썼다. 호남(湖南)으로는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개남 등과 교류가 잦았고 호서(湖西)로는 서장옥, 황하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중략)… 선생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그 본의는 국가와 백성을 위함에서 나온 자라 하겠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3∼274 의역하여 인용)
전봉준이 살았던 여러 곳을 다니며, 사상 형성과 혁명을 끝까지 함께한 끈끈한 동지애는 물론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뭉클하다. 같이 목숨을 걸 수 있는 두터운 교분을 쌓아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그나마 남아 있는 고창 당촌과 정읍 조소리 생가터는 참으로 적요하다. 전봉준이 열어젖히고자 했던 세상을 엿보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아울러 정신을 잇는 '동학혁명 길'을 만들어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며 동학이 열어젖히고자 했던, 세상의 주인은 백성이라는 점을 되새길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