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상도 양반가의 무관 진출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2022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기획 출간해온 '전통 생활사 총서' 중 한 권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책임연구원의 저작이다.
필자가 이 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읽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 책의 주요 관심 대상으로 선택된 '어느 경상도 양반'이 바로 조선 중기 정붕(鄭鵬, 1467-1512)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 4월 '청렴 문관 정붕과 청렴 무관 이순신'이라는 부제의 장편소설 <잣과 꿀, 그리고 오동나무>를 펴낸 필자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저작이다.
직언의 곧은 선비, 명저를 저술한 학자
정붕은 누구인가. 정붕은 연산군에게 바른 정치를 축구하다가 곤장 40대를 맞고 동해안 영덕으로 유배 당한 곧은 선비였다. 청송부사 재직시 영의정의 잣과 꿀 선물 요청을 거절한 일로 시대에 회자된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그의 묘갈명에 "선산은 앞에는 길재 선생의 풍절(風節)이 있고, 뒤에는 정붕 선생의 도의(道義)가 있는 고을"이라 적었다.
뿐만 아니라, 정붕이 남긴 <안상도(案上圖)>는 이름 그대로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읽어 일상생활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덕목을 도설(圖說)로 형상화해낸 명작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1798년(정조 22) 10월 5일자는 퇴계 이황이 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을 싣고 있다.
그런데 정붕의 장남 정의(鄭毅)가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그의 가문에서는 문과 급제자가 나오지 못했다. 이는 인조반정(1623년) 주도 세력인 서인이 북인은 궤멸시키고 남인은 중앙 정계 진출을 차단한 결과였으므로, 경상도 양반 가문에 닥친 일반적 시대상황이었다.
무관 차별 극심, 78.5%가 월급 없거나 임시직
조선 시대에 무관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책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문과 관직은 1779 자리, 무과 관직은 3826 자리였다. 문과보다 무과 관직이 많으니 무관에 대한 배려가 더 좋았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너무나 섣부르다.
당시 정부가 녹봉을 주는, 요즘말로 월급을 주는 관직을 정직(正職)이라 불렀다. 녹봉 없는 무록관(無祿官)과 몇 개월짜리 체아직(遞兒職)까지 포함한 전체 관직이 아니라 정직 자릿수가 얼마나 되는가가 문무 차별의 근본 핵심인 것이다. 문관은 1779 자리 중 88.8%인 1579 자리가 정직인 반면 무관은 3826 자리 중 21.5%인 821 자리만 정직이었다.
문관은 11.2%인 200 자리, 무관은 78.5%나 되는 3005 자리가 무급 또는 임시직이었다. 그만큼 무관에 대한 인식과 처우는 참담했다. 고위직도 무관은 1품과 2품 자리가 아예 없었고, 군영도 최고 책임자 자리는 문관이 차지했으며, 무관은 공식적으로 양성 기관마저 없었다. 그러므로 무과에 급제해도 월급을 주는 관직을 얻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느 경상도 양반가의 무관 진출기>는 '들어가는 말, (1)무관으로 산다는 것, (2)경상도 선산 지역 해주 정씨들의 선택, (3)난관을 헤쳐나간 정찬, (4)훈련원 주부로 마감한 정순, (5)정지신의 전성시대, (6)정달신의 수령 진출기, (7)공동의 대응, 나오는 말'로 구성됐다.
즉, 이 책은 문무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시대의 실상을 다룬 후 가문 차원의 구체적 대응 방안을 세밀하게 살핀다. 저자가 정붕 가문을 선택한 데에는 인조 시대 이후 34명이나 되는 무과 급제자를 배출함으로써 연구의 일반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사람들의 삶을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역사적으로 온전히 이해해 보고 싶어서 선상의 해주 정씨들의 이야기를 선택했다('들어가는 말')"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정해은, <어느 경상도 양반가의 무관 진출기>, 변형국판, 180쪽, 세창출판사, 2023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