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미국이 이쁘게 치장을 하는 달이다. 낮에는 짙은 초록색 전나무 리스(Wreath)들과 알록달록한 장식을, 밤이면 환하게 밝혀지는 불빛을 보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마침 남편이 맨해튼에 갑작스러운 약속이 생겨 차로 다녀온다기에, 기회를 놓칠 새라 아이들과 함께 얼른 따라붙었다. 남편이 일을 보는 동안, 아이들과 주변 거리를 그저 함께 걷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말이다.
올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맨해튼 5번가의 디오르&삭스(DIOR NY& Saks) 건물 외벽에 설치된 대형 꽃 나비 장식(꿈의 회전목마)이다. 밤에는 15분마다 라이팅쇼도 펼쳐진다. 록펠러 센터 크리스마스 트리와 마주 보고 있는 데다 7층 건물 크기라 인파 속에서도 잘 보여서, 쇼핑을 하거나 길을 걷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어 서서 라이팅쇼를 즐기고 있었다.
록펠러 센터에 세워지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크리스마스 시즌 사람들이 즐겨찾는 대표 명소이고, 그 외에도 크고 빛나는 장식들이 예쁜 선물 포장지처럼 칙칙했던 마천루를 덮어준다. 매년 보는 장식은 반갑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치장하고 눈길을 끄는 곳도 있다.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핫초코와 와플을 나눠먹으며 걷곤 했지만, 브라이언트 파크의 윈터 빌리지(크리스마스 상점)는 매년 신기한 먹거리들이 늘어나 모른척 하기가 힘들다.
꼭 맨해튼까지 가지 않아도 사실 나는 우리 동네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자기집에 꾸미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더 즐기는 편이다. 보통 11월 마지막 주의 추수감사절이 끝나면 장식을 시작하지만, 올해는 어째 10월 핼로윈이 끝나자마자 크리스마스 장식을 설치하는 분위기였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하다고, 나도 더 추워지기 전에 장식부터 설치할까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올 11월은 추수 감사절을 위한 마당 장식을 잘 보지 못한것 같다. 호박이나 터키 모양의 풍선인형 같은 것 말이다.
"그것 또한 문화 차이네요. 한국은 크리스마스라고 집을 꾸미지는 않거든요."
한국을 떠나온 지 꽤 오래되어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창문마다 벽마다 아빠가 직접 만들고 붙이시던 크리스마스 장식에 익숙해서 였을까. 그러고보니 한국에 있는 지인의 말대로 집 외관에 성탄 장식을 한 아파트나 집을 잘 못본 듯하다. 아빠덕에, 나는 그만 한국도 미국처럼 다들 집을 장식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친정이든, 지금 사는 마을에서든 집 외관을 장식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다. 물론 전체 데커레이션은 집안 마님들의 취향이 반영되었겠지만. 지붕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크리스마스 전구를 달거나. 마당에 인형과 장식물을 내놓고 고정시킬 준비를 하는 바깥양반들의 모습은 겨울 초입의 흔한 광경이다.
차로 천천히 드라이브하면서 골목골목을 돌아보기도 하고, 해 떨어질 무렵 아이들과 걸어 다니며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지역 신문과 인터넷 게시판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 집의 주소들이 공개되고, 새로 등장한 예쁜 집들을 소개하는 포스팅도 간간이 올라온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한 미국이지만 이맘때만큼은 낯선 이들이 골목을 좀 돌아다녀도, 차로 천천히 다니며 동네를 구경하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지붕 테두리를 따라 단정하게 불을 밝히는 정도의 장식을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크리스마스 마을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대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족들이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형상화한 장식을 세우는 듯 하고, 대부분은 미국다운(?) 요란한 장식을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풍선 인형, 켄디 케인, 장난감 병정, 산타 할아버지와 썰매, 좋아하는 캐릭터들로 마당을 꾸민다. 작년 유행은 크리스마스나 겨울 상징들을 벽 위에 비추는 움직이는 조명이었는데, 올해는 네온 사인이 유행인가 보다. 골목마다 한 집씩은 설치가 돼있다. 대형 유리창을 이용해 아예 크리스마스 영상을 돌리는 집도 보았다.
한 해에 한두 개씩, 장식을 새로 구입하다보니 장식이 점점 늘어나 마당이 가득 찬 집들이 많다. 자세히 보면 옛날 목각 인형부터 최신 전구 인형까지 다 모여 있다. 이웃집과 친하면 마당을 이어서 같은 테마로 꾸미기도 한다. 지나면서 보니 어떤 골목은 양쪽 집들이 같은 테마와 색깔로 장식을 해 골목을 통째 크리스마스 거리로 만들어 놨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 동네에서 꽤 유명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집이 있다. 집 주인이 안 나오시나 며칠 계속 기회를 보았다. 이 많은 장식을 하시는 이유는 뭔지,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어떠신지 묻고 싶어서였다.
장식을 직접 하시는 주인아저씨는 아니고 가족인듯한 분만 겨우 집 앞에서 만났다. 슬쩍 여쭈었더니 그저 웃으며 '크리스마스니까요!' 한 마디만 하고 들어가 버린다. 내심, 이웃과 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든가, 뭔가 좀 그럴듯한 한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잠깐 사이, 그 단순한 한 마디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내가 사는 동네 분위기는 조금 보수적이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작년 언제쯤, 어떤 분과 짧게 안부를 주고받다가 '새로운 (시대) 요구들이 좀 버겁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다양성에도 위배되고, 타종교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 '해피 홀리데이'라고만 인사하라니 고개를 흔들게 되더란다. 아마 뉴욕시의 어느 고위공직자가 내린 그런 지시가 반감을 얻어 취소된 일이 있은 직후 나누었던 대화같다. 그분이 공무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을 모욕하려고 일부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거나 초콜렛을 나누고 카드를 보내는 건 아닌데, 그러라고 하는 지시가 이해도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지만 너무 꼬치꼬치 따져가며 바꾸려 하고 문제를 삼으려 드니 버겁다는 뜻일 테다.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기술 뿐 아니라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 가치관과 태도도 쏟아진다. 그렇다.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란 사람과 시간의 협업 결과이니 물꼬를 틔우거나 폭을 넓히는데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여전히 크리스마스 본연의 뜻을 따라 예수의 탄생 의미를 묵상하며 낮은 자리,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이도 있고,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이도 있고, 그저 흥겨움에 취해 보내는 이도 있다. 저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는 방법은 다르지만 적어도 이 시즌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기쁨으로 채우려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분모'가 있다. 혹여 소외된 이들을 챙기려는 기부 문화와 함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매년 집을 아름답게 꾸민 이웃들 역시 그 '기쁨의 문화'에 즐겁게 동참하는 걸 거다. 그저 크리스마스니까.
지난주 어느 밤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작은 공원 곁 시크교(Sikh) 기도 센터 앞을 지나게 되었었다. 크리스마스 장신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자주 지나는 길이라 매번 그냥 지나쳤었는데, 오늘은 왠지 여러 생각이 든다. 주민들은 이미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어우러지며 이웃이 돼가고 있다. 그 이웃됨의 도리를 성급히 강제하기보다 너른 이해와 공공의 안녕을 위한 방향으로 물길만 잡아주면 어떨른지. 생각이 앞서 가시는 분들은 느린 변화가 답답하겠지만 말이다.
맨해튼의 크리스마스 야경을 구경하고 다니다가 패션 스트리트 5번가의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의 건물들을 지나 성 패트릭 성당에 들어섰다. 뉴욕 최대, 세계에서 11번째로 크다는 거대한 성당 건물이다. 여느 때 보다 더 많은 관광객으로 가득 찼지만, 분위기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21개라는 각기 다른 제단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다가 피에타(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주검을 안은 마리아 상을 이름)를 만났다. 미켈란 젤로의 작품보다 약 3배가 크다 한다. 피에타 상 바로 곁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꾸며져 있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한 장면으로 보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분쟁과 갈등, 미움과 나눔으로 가득한 세상에 신적인 평화의 능력이 깃들길. 권력이나 소유가 아니라 삶으로 사랑의 능력을 보이신 예수. 우리네 삶이 조그만 빛을 내는 색색깔 전구 같아지길 작은 기도의 마음을 품고 한참을 피에타 앞에 머무르다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구경거리 중 뭐가 가장 마음에 들었냐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좋단다. 의외의 대답에 심쿵 했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을 잃은 지구촌의 이웃들이 내년 이맘때는 꼭, 자신의 집과 방에 예쁜 장식 하나쯤 달 수 있게 되기를. 그저 크리스마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