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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다시 만날 그날까지 16] "백마강 귀신 되려고..." 골령골 유족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https://omn.kr/26u6w)에서 이어집니다.

아버지 행적을 찾아서

어느 날 전미경은 51년 만에 대전 골령골 암매장지가 아버지가 묻힌 땅임을 알게 된다. 매장지 현장은 '술 한 잔 부어 놓을 곳이 없이 더러운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전미경은 아버지 유골이 어디쯤 묻혀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망연자실한 전미경은 "반백 년을 훌쩍 넘게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지를 찾아왔건만 땅이여! 거기 누구! 내 아버지 가실 적에 본 사람 없소!"라고 통곡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시작한다.

골령골 여목사 이야기

또 통화는 계속된다.

- 회장님, 처음으로 골령골에 방문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1999년도 무렵? 평소 뼈저린 삶 속에서도 항상 아버지의 상흔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여유! 맨날 골령골 한번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더니 어느 날 아들이 골령골에 한번 가보자고 했시유. 설레는 마음으로 아들 차를 타고 골령골에 도착하니 교회 한 채가 보였시유. 교회 옆 텃밭에서 여목사가 밭을 매고 있어 가까이 가니 목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시유.

그래서 제가 '예, 여기 한국전쟁 때 학살지 아니여유?' 했더니,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밭을 매면 치아와 해골이 자꾸 나와 굴러다녀서 저기 신작로나 고랑으로 던져버린다니깐요' 하대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목사님 좀 보소! 그래 당신 아버지 산소에 가서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해볼까유' 하며 소리 질렸시유. 그랬더니 목사가 슬슬 피해 도망치데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당신이 그러고도 목사냐고 소리 질렀더니 아들이 말려서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어유."


이후 교회는 임시 발굴 감식장으로 활용됐고 지금은 철거됐다.
     
나는 상중이오

보도 듣도 못한
골령골 진달래꽃은 유난히 붉은데
학살지 민들레는 함박웃음 웃고

너의 발밑 반세기 전
자식 죽여 젓 담은 줄 모르고 웬 웃음
썩는지 삭는지
농부들 밭갈이에 몇십 번을 부서졌나

살아서 결박이요 죽어서 해해년년
뼈 부서지는 것은 무슨 죄목인가
결박을 풀어야 하늘이든 지옥이든 갈 것 아니오

임종은 고사하고 아비 죽어 반백 년
상 못 치르는 불효
나는, 나는 상중이오.

-작가 전미경
 
전미경과 대전유족회의 첫 만남
 
"회장님, 건강은 어떠세요. 별일 없으신가요?"


사실은 몸이 안 좋으시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 그 정도 수난을 겪었는데 안 아픈 것이 이상하다.

- 대전유족회 인연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2002년 7월 어느 날 대전 아들 집에 가다가 서대전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에 눈이 동그래졌시유. '한국전쟁기 대전형무소 피학살자 위령제'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보였시유. 그 현수막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시유."
 
 대전골령골 민간인 집단학살 표지판
대전골령골 민간인 집단학살 표지판 ⓒ 김영희
 
 전미경 대전유족회장이 대전골령골 검은 비석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
전미경 대전유족회장이 대전골령골 검은 비석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 ⓒ 김영희
   
차를 돌려 위령제를 지낸 매장지 골령골 찾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검고 조그만 비석만 저를 기다리고 있었시유. 저는 비석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었시유. 현수막을 뒤늦게 봐, 위령제를 지낸 후였시유. 그때 결심했시유.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아버지 위령제를 모실 것을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시유. 그해 추석 2002년 9월 21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차례를 지내고 대전 산내 골령골에 간단한 제물을 가지고 도착하니 8시경이 되었시유. 제물을 펼쳐놓고 큰절을 올렸어요. 그리곤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유족은 한 명도 오지 않았시유.

어찌 이곳에서 7000여 명의 학살당했건만 명절인데 유족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위령제 주최단체를 수소문 했시유. 그해 11월 딸이 여러 시민단체를 수소문한 끝에 '대전 참여연대'에 연락해서 2개월 만에 유족 문양자씨를 만나게 되었시유. 그리하여 '대전유족회'를 결성했고 매달 유족회의 및 위령제를 지내는 모든 제물과 점심을 부여에서 준비해 트럭에 싣고 가서 위령제 행사를 했시유. 유족회 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고 그게 아버지 명예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시유."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출범 소식

- 1기 진화위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그게유! 고 노무현 대통령 시기 1기 진화위가 대통령 상설기관으로 출범되면서 유족회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시유. 저는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진화위에 쫓아다녔시유. 2006년 3월 14일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어느 날 등기가 와서 받아 보니 진화위에서 온 우편물이었시유. 허둥거리며 우편물을 뜯어 보니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시유."

-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전재흥은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지만, 공권력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였시유.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대전형무소 수감돼 있다가 학살된 것이 분명한데 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시유. 정신을 차리고 불능 처리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시유. 군법회의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시유. 이때부터 저는 투사의 역할을 자임했시유.

진화위에서 불능 통보받은 2010년 10월 29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돼 그는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요지는 "1951년 진행된 군법회의는 불법적이며 위헌적이다"라는 것이었다. 즉 제헌헌법에 군사법원과 같은 특별법원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군사법원은 1954년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외로 진화위는 최능진(독립운동가)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951년 1월 2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2월 21일 사형집행 된 최능진은 법적 근거도 없는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결정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예외 조항으로 똑같은 사건의 전재흥 역시 불법적인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해 판결되어 죽음에 이르렀기에 진실규명되어야 할 일이잖아유. 근디 최능진은 진실규명이 되었고 전재흥은 불능 처리된 것은 형평성에 심대한 오류가 발생한 것이지유."

청천벽력 같은 소식

- 그랬군요. 정말 억울하셨겠어요.

"예, 그래서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부여군청 그리고 대전 형무소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다시 대전 국가기록원을 몇십 차례 방문해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국가기록원 직원이 저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그럼 육군본부로 한번 가보세요'라고 해서, 바로 육군본부로 발길을 돌렸시유.

2010년 10월 6일 육군본부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출하고 명단 신청했시유. 조금 있으니 담당자가 출장가서 확인이 안 된다고 하대유. '출장을 가면 업무를 대행하는 직원이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래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전화한 후 '아버지 판결문이 있다'고 하더라고유! 그러면서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허길래 '야! 괜찮어유! 저는 60년도 기다렸는데 뭘 못 기다리겠냐'고 하면서 의자에 누워버렸시유.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프차를 타고 온 장교가 봉투를 내밀면서 직원에게 전달했고 곧 판결문은 제 손에 들어왔시유. 판결문은 30쪽 분량으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어유. 앞면과 뒷면이 복사돼 있었고, 펜촉 글씨와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시유. 아버지가 강압수사와 모진 고문으로 누명을 쓰고 '살인자'로 판결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놀랐어유. 그동안 아버지는 보도연맹 활동으로 학살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유.

갑자기 살인자라니, 청천벽력같은 판결이었어유. 하늘과 땅이 맞닿는 듯 하앟게 보였시유. 육군본부 앞 벤치에 앉아있는데 판결문을 가슴에 안고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유. 평소 잘 울지만, 그날 만큼 슬피 울어 본 적 없었시유. 눈물이 앞을 가려 육군본부에서 부여 집까지 40km를 어찌 자동차를 끌고 왔는지 기억이나지 않아유. "
 
 전재흥(전미경 부) 사형 확전 판결문
전재흥(전미경 부) 사형 확전 판결문 ⓒ 김영희
 
하루하루가 지옥

- 판결문을 받은 후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셨어요?
 

"판결문에서 '주소 불능'이라는 말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리고 저려서 울음으로 나날을 보냈시유. 아버지가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은 동료 수감자와 가족의 증언으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 자신이 사는 집 주소도 대답할 수 없을 정도 혼수상태에서 살인자로 둔갑됐나 하는 생각 때문에유. 그 충격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일 밤 백마강 강둑을 왕복 30km 밤새워 타고 또 타고 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곤 했어유. 그리고 트로트 노래를 그렇게 좋아해서 일할 때도 라디오를 들고 다니면서 따라 부르고 했는데 판결문 받고 난 이후 노래를 부르지 않아유.

아버지 억울한 죽음 앞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시유. 이런 고난의 행군은 결국 몸에 이상을 가져왔고 온갖 스트레스로 치아가 모두 빠져버렸시유. 아랫니, 윗니가 모두 주저앉으면서 지금의 치아는 모두 임플란트여유.

정신을 차리고 판결문을 한글로 해석해줄 분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농민회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어유. 다행히 한자를 잘 아시는 사람을 소개받아 한글 번역했시유. 번역된 판결문을 받아 보는데 눈이 반짝반짝했어유. 이제는 참고인 찾는 데 일념할 것이라고 다짐했어유."

전미경 시집의 애환

전미경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는 "개인의 삶 외에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고모 등에 이르는 가족사이자, 나아가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유족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역사가 개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신랄하고 정제된 시어로 고발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꾸짖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되묻고 있다."

* 18화 골령골 전미경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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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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