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실을 기록한 새로운 일본 공문서가 확인됐다.
<마이니치신문>은 25일 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 씨가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40여 명이 살해됐다고 기록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를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조선인 관련 헛소문 믿는 일본인들, 몽매한 무리" 지적도
이 문서에 따르면 간토대지진이 1923년 9월 1일 발생하고 사흘 뒤 경찰관들이 조선인 200여 명을 잡아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우라와에서 후카야·혼조 경찰서 방면으로 이송했다.
당시 사이타마현 서부 지역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육군 지방기관인 구마가야연대구사령부는 낮에 이동하지 못한 조선인 40여 명이 해가 저물자 "살기를 품은 군중에 의해 모조리 살해됐다"라고 문서에 적었다.
구마가야연대구사령부는 이 사건을 '선인(鮮人·조선인을 비하하는 말) 학살', '불상사', '불법행위' 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조선인 습격은 없었다. 방화도 없었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말도 듣지 않았다"라면서 당시 일본 사회에 떠돌았던 조선인 습격이나 방화 소문이 적어도 해당 지역에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마가야연대구사령부는 밤에 학살이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조선인 이송은 밤을 피할 필요가 있다"라며 "밤에 조선인을 이송하면 어두운 곳에서 사람이 살해되는 참상을 보게 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이 문서에서 재향군인회 구마가야지부장은 조선인 관련한 헛소문을 믿는 일본 사람들을 "사리를 모르는 몽매한 무리"라고 비판했다. 문서는 1923년 12월 15일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됐다.
조선인 학살 인정 않는 일본 정부
<마이니치신문>은 "이 문서는 조선인들을 살해한 이를 '살기를 품은 군중'이라고만 적고 구체적인 신분이나 상황을 기술하지 않았다"라며 "다만 조선인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일본) 민중의 폭력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을 자세히 보고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료는 지진 직후 일본 정부가 조선인 불법 학살 사실을 인식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전했다.
일본 수도권인 간토 지방에서는 당시 대지진으로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200만여 명이 집을 잃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 등의 헛소문이 퍼지면서 약 6천 명의 조선인과 800명의 중국인이 살해됐다.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 관련 공문서와 자료는 여러 건 발견됐으나, 일본 정부는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앞둔 지난 8월 일본 정부 대변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정례회견에서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학살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도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별도의 추도문을 보내지 않으면서 "무엇이 명백한 사실인가는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일"이라고 언급을 피했다.